동대문디자인플라자/02

018

두툼하게 휘감기는 면으로 연출된 난간과, 엄청난 길이로 뻗어 나온 캔틸레버 건물 본체 사이. 주변의 낯익은 건물들이 낯선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019_01

둥글둥글한 알루미늄 패널 마감의 건물본체와 꿈틀거리며 흘러가는 노출콘크리트 덩어리는 충분히 현란한 조형입니다. 하지만 표면이 매끄럽고 색깔이 차분해서 디디피는 오히려 조용히 배경으로 후퇴하고, 사이로 보이는 길 건너 거대 쇼핑 건물들이 마치 주인공처럼 도드라지는 모습입니다. 맥락에 대한 아무런 존중 없이 일방적으로 들어선 조형이기 때문에, 오히려 생생하게 꿈틀거리는 현실에 대해서 배경, 혹은 액자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019_02

이화여대캠퍼스센터(eccp) 효과와 비슷합니다. 워낙 이질적이기 때문에 배경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일상에 대한, 서울의 풍경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019_03

마지못해 마련된 역사유적의 흔적과 맥락 없이 둥실 떠오른 거대한 금속 덩어리. 그 사이로 보이는 거대 쇼핑몰 건물들. 간단한 구도 만으로 무시할 수 없는 묵직한 메시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021

안개님의 안내를 따라 이 곳으로부터 건물 내부 답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입구가 워낙 많다 보니 입구마다 번호를 붙여놓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번호 간판이 아쉽습니다.

알루미늄 패널 마감 부분의 입구 간판들은 매끄러운 조형감을 최대한 강조하기 위해서 마치 피부 위의 문신처럼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023

각종 이정표나 안내문들도 마찬가지였구요. 디자인 의도와 그 의도를 구현하는 완성도가 충분히 공감됩니다.

024

그에 비해 군더더기처럼 붙어있는 노출콘크리트 부분의 간판은 아무래도 아쉬운 거죠. 아쉬움을 접어두고, 입구로 들어갑니다. 미끈하게 한 덩어리로 연출된 건물이라, 사람과 직접 만나는 부분의 스케일 감각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 출입구들이 한결같이 사람 몸의 스케일을 크게 뛰어넘지 않는 모습입니다.

025

내부 또한 이음새 없이 매끄럽게 연출되어 있었습니다. 동굴처럼 말이죠.

026

스케일 감각은 계속 이어집니다. 주변의 다른 방이나 전시실로 들어가는 입구 부근에서는 복도가 살짝 확장되는데, 복도 높이 가득 꽉 차게 접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키가 의식되는 높이만큼만 살짝 휘어지며 접힙니다.

027

천정의 높이 차이로 자연스럽게 공간의 쓰임새가 나뉘어지는 효과도 일어납니다. 천정 높은 부분은 흘러가는 공간이고, 천정 낮은 부분은 움직임이 잠시 멈추는 공간입니다. 표면이 매끄럽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공간 연출 의도가 각별하게 느껴지는 듯도 합니다.

028_01

온갖 기호들도 매끄러운 표면에 어울리게 디자인되어 있었습니다. 겨냥하는 방향의 끝만 살짝 튀어나온 화살표.

029

소화전 등의 뚜껑들도, 최대한 매끄러운 벽에 스며드는 식으로 디자인되었네요.

그에 비해 비상구 표시 램프나 콘센트 박스가 살짝 튀어나와 있는 모습은 조금 아쉬웠고, 옥의 티였습니다. (남이 열심히 잘 해 놓은 건물 보면서 까탈스럽게 따지자니 조금 멋쩍습니다만.)

033

자하의 공간답게 벽이 기울어져 있는데, 가끔씩 뚫려있는 화장실 출입구에서 드러나는 벽의 단면 윤곽을 통해 구체적인 표정을 가늠하게 됩니다.

034

복도의 끝, 또 다른 출입구 너머로, 그 유명한 ‘이간수문’이 보입니다. 두툼한 창틀 때문에 깔끔하게, 온전히 보이지 않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처마 높이 또한 그렇습니다. 처마 너머 이간수문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게끔 높이를 설정할 수는 없었을까요. 주인공이 액자 테두리 안에 깔끔하게 들어오도록 말이죠.

다른 문들을 보면, 앞서 말했던 것처럼 사람의 스케일에 맞는 크기로 뚫려있는 경우가 많았고요.

외부공간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 길게 찢어진 창문과 함께 문을 만들어지는 부분도 있었는데, 이 경우에도 유리 창문의 높이는 사람 몸의 스케일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습니다.

널리 트인 외부공간에 면해서 뚫린 문의 경우, 문 자체의 크기는 변함 없지만, 문 언저리부터 표면을 옴폭 들어가게 접은 식으로 연출되기도 했는데요. 기본적으로 정해진 스케일 감각은 유지하면서, 상황에 따라서 섬세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죠.

039

오간수문에 면한 출입문의 경우도, 문 자체의 크기는 복도 높이에 맞춰 그대로 유지한다 하더라도, 바깥의 처마 높이는 다소 높게 가져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문에서 처마 아래 공간으로 이간수문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도록 말이죠. 아마도 구경하는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다른 사정이 있었겠지요.

어쩌면 이렇게 옴폭 후퇴해서 처마 밑 공간을 만든 것 부터가, 이간수문과의 관계를 의식한 결과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깥으로 나와서 문을 보았는데요. 오간수문으로 이어지는 성벽과 맞닿고 있네요. 앞서 보았던 매끄러운 노출콘크리트가 아닌, 입체 문양이 돋아있는 노출콘크리트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성벽을 의식한 디자인이었을까요.

042

오간수문을 통과하면, 여러 가지 시간의 켜가 하나의 풍경에 모여있는, 놀라운 모습이 보입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동대문운동장조명탑/거대쇼핑몰/한양성벽.

043

휘감기듯 흘러가는 성벽.

044

앞서 문에서 보았던 알루미늄 패널의 흐름을 닮았습니다. 의도였을까요.

047

매끈하게 흘러가던 알루미늄 패널 벽면에서 문득, 퉁명스러운 표정의 문이 보입니다. 투박하게 잘려지는 모습에서 멋 부리는 문이 아닌, 장비 반입 등의 실용적인 요구를 위해 설치된 문이라는 사실이 느껴집니다.

048

알루미늄 패널 벽은 알루미늄 타공 패널로 슬쩍 바뀌었다가, 이내 노출콘크리트 벽체가 됩니다. 타공 패널은 바람이 드나드는 급배기구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재료가 바뀌고 상황이 바뀌어도 전체 덩어리의 윤곽은 매끄럽게 이어집니다.

049

느슨하게 올라가는 비탈길을 올라가면서, 비로소 이 곳이 ‘공원’이었음을 실감합니다. 날렵하게 마름모꼴로 잘려진 바닥판이 디디피 이미지와 어울리는 느낌입니다.

050

가로수 뚜껑 또한 마름모꼴인데, 랜덤 패턴의 구멍이 뚫려있네요. 바닥 포장 돌판의 문양과 이어지는 수법임을 이해하겠습니다. 다만 돌판 패턴에 똑 똘어지지 않게 맞추어진 모습은 조금 의외였네요.

 

동대문디자인플라자/01

‘서울시 디자인레터’에 실릴 내용을 취재하기 위해, 안개님과 함께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하, ‘디디피’)에 다녀왔는데요. 그 내용을 정리해서 일단 여기에 먼저 올립니다.

아시다시피 디디피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이루는 지형의 일부로 조성되어, 사방에서 접근할 수 있게 설계되어있습니다. 덩치도 크거니와 출입구도 여럿이고, 또 내외부의 공간이 다양한 레벨에서 입체적으로 엮여져 있는지라,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낼 것인가’ 라는, ‘관찰의 시퀀스’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겠는데, 지하철역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으로 답사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흔히 접하는 지하철역 지하보도의 풍경입니다. 맥락이 지워진 ‘무균 공간’을 걷다 보면, 문득 살짝 기울어지는 완만한 형상의 입구와 마주하게 됩니다. 디디피가 홀로 ‘잘 나가지’ 않고, 성공적으로 주변 동네와 함께 공존하며 활력을 퍼뜨리기 위해서, 우선 이 지하보도가 활성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 공간은 평범한 지하보도와는 어떻게든 다르게 디자인될 필요가 있습니다. 깔끔하고 지루한 통로로 끝내기에는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통로를 겸한 어떤 다른 기능이 함께 부여되어야 할 것입니다.

003

살짝 기울어진 기둥윤곽과 둥글게 말려들어가는 경계부분처리가 디디피의 디자인 정체성을 암시하는 듯 합니다.

문을 통과하면 열주로 이루어진 또 다른 경계와 마주하게 됩니다.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이동하는, 가슴 벅차도록 극적인 체험입니다.

005

먼저 마주치게 되는 것은, 노출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거대한 육교입니다.

006

건축의 스케일을 넘어서는, 토목 스케일의 크기인데요. 얼핏 과장된 몸짓으로 보이는데, 건물을 주변 도시 맥락과 연결하여 묶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었습니다. 건물의 형상이 워낙 떠다니듯 유동적인 이미지인지라, 강하게 묶어주는 몸짓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음직합니다.

널리 알려진 조감도의 시점에서는, 이 육교가 ‘동대문역사문화공원교차로’에서 디디피로, 대각선 방향으로 연결되는 상황이 잘 드러납니다. 그런데 사실, 육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부터의 지상 유동인구 량은 그다지 크지 않고, 당분간은 그리 크게 늘어날 것 같지도 않아 보입니다.

008

오히려 육교의 흐름이 제대로 ‘기능’하는 것은, 지하철역으로부터 직접 연결되는, 아랫부분입니다. 그래서 육교라고 말하기 보다는 지하철 연결통로를 이루는 회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 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009

회랑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인데, 상부의 ‘판’과 지탱하는 ‘보’의 접합부분이 살짝 접히듯 파여지는 식으로 연출되어 있었습니다. 덕분에 한결 가뿐해 보이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죠.

010

묵직하고 부드럽게 흘러가던 회랑은 살짝 휘어지면서 알루미늄 패널로 이루어진 디디피 본체로 스며들어갑니다.

어떤 부품들을 어떤 방식으로 짜맞추어 만들었는지, 즉, ‘구축’에 대한 정보가 최대한 감추어진, 그냥 둥글둥글한 허깨비, 흔히 이야기하는 우주선처럼 디자인된 건물이지만, 이런 장면에서는 익숙한 수법을 만난 듯 해서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바닥판은 알루미늄 패널 스킨을 꿰뚫는 반면, 난간 부분은 스킨과 만나기 직전 끊어지는 모습입니다. 가끔씩 보이는 이런 식의 연출이 건물의 이미지를 야무지게 만들어주고 있었습니다.

012

떠받드는 기둥과 바닥을 이고 있는 보가, 마치 모노코크 구조의 비행기나 자동차 뼈대를 연상케 합니다. 벽과 천정에서 되풀이되는 조형어휘가 방향성을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013

그런데 한편으로는, 기둥마다 놓여있는 작은 화분이 눈에 거슬리더라고요. 기껏 힘들여 연출해 놓은 역동적인 이미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

015_03

지하를 거닐다 보면 여러 동선들이 발견되고, 또, 건물본체가 이리저리 휘감기듯 접히는 모습도 보이는데, 절로 감탄이 나오더군요.

015

015_01

015_02

015_06

그리고, 이 시점에서의 이런 장면을 찍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이렇게 넓게, 그리고 정처 없이 꿈틀거리는 ‘건물의 아랫면’을 만나는 기회는, 아마 전세계적으로도 드물 것입니다.

모니터 속 라이노 모델링 화면이 그대로 실체화된 풍경입니다. 수 없이 다듬어졌을 모델링이겠는데, 그래도 얼핏 조금 어색해 보이는 부분이 아주 가끔 있었습니다.

015_07

이렇게 매끈하고 둥글둥글한 디자인이기 때문에, 마감 패널 계획이 아주 중요해집니다. 지루함을 덜어내고 스케일 감각을 전달하기 위한 패널 나뉨 계획.

판교_운중동_주택/02

011

복도. 오른편에 마당을 끼고, 왼편에 펼쳐질 가족실 방면을 바라 본 모습.

012

복도. 오른편에 가족실을 끼고, 왼편에 펼쳐질 마당 방면을 바라 본 모습.

마당과 가족실이 바람개비처럼 맞물린 평면의 구성이 쉽게 읽히는 장면입니다.

집을 구성하는 나름의 규율에 맞추어 차곡차곡 짜여진 몇 가지 재료들의 조합이 보기에도, 만지기에도 즐겁습니다. 마당과 가족실 등 안팎의 빈 공간과 함께, 복도를 오가는 일상의 삶 속에도 윤기와 따스함을 불어 넣겠지요.

012_01

마당을 규정하는, 날아가는 벽. 기역자로 뚫린 개구부는 공간에서 공간으로 넘실거리는 소통의 통로이자,

012_02

겉에서 보이는 집의 표정을 특징 짓는 중요한 디자인 어휘이겠는데,

012_03

그래서, 실제로는 구석이 막혀있지만, 기역자로 뚫린 것 처럼 연출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만.

013 

이 기역자로 뚫린 모티브는 주인 침실,

013_01

014

1층 가족실에서 욕실로 이어지는 연결부분 등, 집 안 이곳 저곳에서 연거푸 되풀이됩니다. 그 만큼, 집의 인상이 또렷해지고, 집 안에서 펼쳐질 일상에서의 경험 또한 탄탄하게 정리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

015

곳곳에서 펼쳐지는 촉각적인 재료의 향연 또한 즐거웠습니다. 가족실의 계단과 객석(?)은 자작나무 합판을 겹쳐서, 단면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짜여있었는데요. 낯설지 않은 재료를 집요하게 활용하여, 재구성, 재발견하는 와이즈 건축 특유의 성향이 잘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016_01

자작나무 합판은 공부방의 책상,

016

아이방의 수납장, (합판의 적층된 구성을 활용해서 손잡이를 깎아낸 이런 장면에서는 정말이지 탄성이…)

016_02

다락으로 올라가는 수납장 겸 계단,

016_03

욕실의 수납장 등, 집 안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며 활용되고 있었는데요. 이런 집에서 살다 보면 재료의 짜임새에 대한, 혹은 촉감에 대한 감각이 무럭무럭 자라날 것만 같습니다.

018

반투명한 미서기 문을 여닫을 때 자연광이 조절되는 이런 재치있는 장면도 있었네요.

017

현관 천정은 노출콘크리트 마감인데, 현관 바닥으로 깔린 트래버틴과의 궁합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017_01

노출콘크리트, 자작나무 합판, 벽돌 등, ‘쌩’ 재료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이 인상적인 한편으로,

굳이 어렵게 이 부분만 노출콘크리트로 몰아간 모습에서는 어떤 고집이 느껴지기도 하고, 혹은, 안팎의 연결점이 되는, 현관이라는 중요한 공간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던 건축가의 마음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3줄 정리.

1. 얼마 전, 와이즈건축으로부터 초대를 받고, 근작, 판교 운중동 주택에 구경갔었습니다.

2. 반가운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나서 즐겁기도 했고, 좋은 작품을 접하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3. 여기저기 잡지에서 잘 다루어질 작품이라는 생각에 사진을 많이 찍지 않았었는데, 조금 후회됩니다.

 

판교_운중동_주택/01

며칠 전, 와이즈 건축에서 최근 완공한, 판교 운중동 주택의 오픈 하우스에 구경 다녀왔습니다.

001

단단하게, 단순하게 처리된 윤곽 속,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

002

대략 정육면체의 볼륨, 정사각형의 평면. 정사각형은 다시 네 개의 작은 정사각형으로 나뉘어지는데, 한쪽은 날아다니는 벽으로 규정되는 마당, 그리고,

003

마당으로부터 대각선 방향의 맞은편에는, 가족실이 놓여있었습니다. 성격이 다른 커다란 두 개의 빈 공간이 자아내는 긴장감과 두 공간 사이를 오가는 흐름이 집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는데요.

004

마당에서도, 그리고,

005

미디어 감상실을 겸하는, 커다란 계단, 혹은 객석으로 연출된 가족실에서도,

006

입체적으로 비껴 흘러가는 시선의 흐름, 움직임의 흐름이 공간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007

단순하고 명쾌한 구성의 평면인데, 구석구석, 아기자기하고 역동적인 공간의 흐름이 돋보이고,

008

그렇게 풍요로운 공간의 흐름을 통해, 앞으로 이 집에서 펼쳐질 일상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009

010

010_01

접혀지고 펼쳐지는, 그리고 다시 접혀지는.

공간을 거니는 즐거움.

 

 

이응로의집/09

전시실 깎두기 덩어리들을 바깥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개념적으로는 ‘깍두기’의 한 면만 흙벽으로 마감되어야 하는데, 재료의 한계 때문인지 옆의 벽면으로 살짝 말아 들어간 모습이 보입니다. 말아 들어간 약간의 폭이 벽의 두께를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선홈통이 눈에 띄는데, 저 정도의 요소를 많이 거슬린다고 생각하여 옹벽에 매입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안도 다다오의 경우는, 선 홈통을 드러내되, 두 개를 나란히 두어서 거꾸로 적극적인 의장요소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지난 포스팅에서 보았던, 급배기구가 두 개 나란히 놓아둔 상황과도 비슷) 단순한 원통으로 처리해서 그나마 괜찮아 보입니다. 이 경우에는, 넓은 벽면에 별다른 줄눈이나 의장요소가 없는 상황이라, 크게 거슬리게 보이진 않는 듯 합니다.

비스듬하게 멀리서 보면, 선홈통이 제법 훌륭한 의장요소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흙벽과 노출콘크리트 벽면이 맞닿는 모서리 언저리가 좀 더 짜임새 있어 보입니다.

드레인과 선홈통이 만나는 부분에 커다란 상자를 두지 않고, 원통 모양이 충실히 드러나게 하는 상황입니다.

또 눈에 띄는 것은, 흙벽 상부에 후레싱을 두면서 살짝 (10센티미터 정도?) 차양을 둔 모습입니다. 모든 깍두기가 아닌, 이 깍두기 하나만 이렇게 되어있었는데요. 사진 찍을 땐 몰랐는데, 나중에 관찰해 보니, 이 깍두기만 지붕의 경사가 흙벽 방면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거에요. 빗물이 넘쳐 흐르면서 흙벽면을 타고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 개의 깍두기 중, 오른쪽 하나만 ‘차양’이 있어서 그림자가 드리워진 상황이 보입니다. 중간 깍두기랑 왼쪽 깍두기는 지붕의 경사가 흙벽 반대편으로 낮아지고 있거든요.

흙벽은 여러모로 매력적인 재료인 것 같습니다. 색이나 질감이 자연스러워서 어색하게 튀지도 않고요. 다만, 앞선 포스팅에서 아크릴 코너가드를 둔 것을 보았듯, 모서리 부분이 깨지기 쉽다든지, 손에 흙 가루가 묻어 나온다든지 하는 단점은 있습니다.

아무튼 또 흥미로운 점은, 조금씩 누르고 다져가면서 쌓아간다는, 구축의 과정이 솔직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수평의 층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오래된 지층의 단면을 연상케하는 패턴이 보입니다.

 

흙벽의 수평 패턴의 폭이 노출콘크리트에서 드러나는 나무널쪽의 폭과 대충 비슷해 보이는 것도 나름 재미있습니다. 이 것도 수평으로 방향을 맞추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흙벽, 노출콘크리트, 그리고 아연도 강판. 궁합이 잘 맞는 재료의 조합입니다.

풍경에 스며들어간 모습.


3줄요약

1. 작년 초, 마음 먹고 조성용 선생님이 설계하신 ‘이응로의 집’ 에 구경갔었는데요.

2. 논리가 명쾌한 건물이라 이해하는 과정이 즐거웠습니다.

3. 곳곳에 이런 미술관이 많이 들어섰으면 좋겠습니다.

 

이응로의집/08

053

방금 내려온 계단. ‘매개공간’에서 느슨한 경사로의 연속으로 처리되었던 높이 차이를 단숨에 연결하는 계단이었지요. 노출콘크리트 계단인데, 살짝 애매하게 둔한  느낌이 들더군요. 화장실에서 나오면서는 이 모습이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조금은 아쉽더라구요.

계단 디딤판 언저리에 시커먼 색의 테두리 철판이 둘러쳐져 있는데, 바닥 테라죠 시공을 위한 틀인 동시에 의장적인 역할도 하고 있네요.

054_01

계단과 벽이 맞붙는 곳에는 틈을 두었는데, 그게 앞서 말씀드린 ‘테두리 철판’의 너비와 얼추 비슷해 보이는 것도 나름 재밌습니다.

바깥에는 별동으로 처리된 게스트하우스(?) 겸 카페가 있었는데, 비스듬한 경사지붕의 깍두기라는 공통된 디자인 모티브인데 마감재료만 나무로 바뀝니다. 프로그램의 중요한 정도에 위계를 두어, 다소 부차적이고 본질에서 벗어난 시설에는 가볍고 임시적인 느낌을 주는 재료로 마감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돌이켜보면, 본동의 입구로비 언저리와 화장실 부분 마감이 나무인 것도 그렇습니다.

별동 또한, 벽이 땅과 만나는 순간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 모습.

바깥에서 보았던 지붕의 조형은 그대로 내부 공간에 반영됩니다. 구석에 몰려서 뚫린 창은 위로 솟아나는 공간은 공간대로 다소 호사스럽게 남겨두고, 바깥의 풍경을 좀 더 밀도 깊게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아, 창이 뚫린다기 보다는, 창이 세워지는 상황이라고 해야 할 듯.

빛이 아래에 몰리다 보니 위의 지붕의 기울기가 어둠 속에 잠기는 데, 그런 것도 나름 매력적이네요.

옆에서 보니 지붕의 기울기와 창의 관계가 잘 드러납니다.

화장실의 급배기 팬 입구. 하나만 붙으면 군더더기인데, 두 개가 나란히 붙으면 의장요소가 됩니다.

실은, 찾아갔었을 때, 더 급배기 팬이 고장나서 실내에 화장실 냄새가 콤콤하게 돌았었는데요. 그리 큰 건물도 아니고, 화장실에 창문을 적당히 뚫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창문을 뚫으면 건물의 추상적인 조형으로서의 느낌이 많이 훼손되니까, 어쩔 수 없었겠지요.

059

나무 쪽널 마감에서는, 이런 모습이 늘 아쉽습니다. 별 것 아닐 수도 있겠지만, 백퍼센트 순수 조형일 수 없는 ‘건물’의 한계가 드러나는 장면인 것 같기도 하고요. 하늘과 맞닿는 경계의 끝까지 나무만 보이게 하는 것은 무리겠지요.

 

이응로의집/07

‘매개공간’과 ‘전시공간’이 끝나는 막다른 곳. 왼편에 다른 공간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보입니다.

047

공간의 경계에서 두 공간을 바라본 모습. 왼쪽이 ‘지원 공간’이고, 오른쪽이 ‘매개 공간’ 입니다. (지난 ‘이응로의집/02’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내용.) 하나는 기능적으로 마련된 지름길 같은 공간이고, 또 다른 하나는 느슨하게 거닐면서 공간과 작품을 체험하며 감상하는 공간입니다.

048

수장고로 통하는 리프트, 다목적 강당, 로비로 이어지는 좁은 복도가 나오는데, 다소 느슨하게 감싸오던 공간의 체험과 작품의 여운이 단단하게 벼려지는 듯 전환되어 마무리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완만한 경사로를 올라갔다가, 가파른 계단으로 내려가면 이전 포스팅에서 보았던 로비가 나올 것이겠습니다.

049

다목적 강당. 기성품이긴 하지만, 썩 잘 어울려 보이더군요.

전면에 키 작은 하얀 벽체가 보이는데, 벽체 뒤에는 음향설비 등이 보관된 수납공간이 있더군요. 너저분한 설비나 비품을 단정하게 가려주는 역할도 하고, 커다란 공간을 적당히 나누어주는 역할도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영상이 투영되는 스크린의 역할도 하고요.

오른편의 유리를 통해, 경사로가 어느 정도 가파르게 되어 있는지 읽히는데,

051

그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면, 낙차 크게 떨어지는 계단이 나옵니다. 공간의 높낮이만 생각하면 이렇게 할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로비와 강당을 그냥 시원하게 열어두듯 연결하고 싶진 않았나 봅니다. 경사로나 계단은, 일차적으로는 높이가 다른 여러 바닥을 연결하는 일을 하는데, 때로는 여러 공간들이 연결되는 정도를 조절하는 역할도 하는 것이죠.

노출콘크리트, 나무, 블랙 스테인리스, 하얗게 도장된 석고보드 등, 몇 가지 재료들이 단정하게 어울리는 모습.

이응로의집/06

043_03

다른 전시실…

천정이 살짝 기울어져있었고, 그래서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졌었어요.

043_06

천정은 노출콘크리트, 작품의 배경이 되는 벽면은 하얀색으로 도장, 그리고, 바깥을 향한 하나의 벽면은 황토로 마감.

지난 포스팅에서 말했듯, 건물을 구성하는 나름의 논리에 맞추어 공간을 이루는 각각의 면 하나하나마다 의미를 부여한 모습입니다. 전시실 공간의 연출이라는 작은 스케일에서의 디자인이 건물 전체의 구성방식이라는, 보다 큰 스케일에서의 디자인으로 연결되는 상황이죠.

 

황토는 만지면 묻어나옵니다.

044

전시실에서 나와서, 올라왔던 ‘사이공간’을 되돌아보았습니다.

045

지나온 길을 따라서 관통하는 시점으로 바라보면, 제법 깊은 공간감이 느껴집니다. 완만한 경사를 따라서 상승하는 지형의 흐름도 느껴지고요.

건축가가 화가의 고향 풍경을 의식했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만, 자연스러운 지형의 흐름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045_01

테라죠 마감은, 넓은 바닥을 단단하게 빚어낸다는 연출에는 적당합니다만,

 

경사진 바닥은 깔끔하게 빚어내기 힘든가 봅니다.

045_03

메탈라쉬로 올린 천정은 세련된 느낌이었는데, 다만, 메탈라쉬를 고정하는 프레임이 필요 이상으로 눈에 띄는 듯 해서 아쉬움이 들었었구요.

045_04

바닥의 지형은 때로는 커다란 계단으로, 때로는 느슨한 경사로로 꿈틀거리는데,

꿈틀거리는 지형에 호응하여, 천정 또한 또 다른 바닥처럼 꿈틀거리는 모습이 지금 보니 나름 인상적이네요.

이응로의집/04

완만하게 올라가는 방향을 따라 들어간 뒤, 뒤돌아 본 모습입니다. ‘매개공간’에 상자처럼 생긴 전시실이 맞물린 상황이 잘 보입니다.

‘전시 상자’ 양 옆으로는 햇볕과 함께 바깥풍경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구요.

031-01

‘전시 상자’ 사이로 보이는 햇볕과 바깥 풍경 또한 전시실 안의 컬렉션 못지 않게 중요한 전시작품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031

아무튼 이런 상황은, 장누벨이 설계한 리움에서도 발견되는, 형식으로만 보면 그리 새로울 것은 없는, 아주 단순한 구성인데, 기대 이상으로 현란한 분위기가 연출되더군요. ‘전시실 내부’와 ‘매개 공간’이 입체적인 꼴라주를 이루며 충돌하고 있었는데, 제법 비현실적인 인상을 주고 있었습니다.

공간구성과 함께 내부 조명이나 마감재료로도 대조가 이루어져, 차이가 극명해지고, 보다 극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덕분에 공간의 감각이 왜곡되는 듯한 착각도 들고요.

물리적으로는 ‘전시실’과 ‘매개공간’, ‘바깥 풍경’, 세 가지의 꼴라주이겠는데, 의미적으로는 ‘작품’과 ‘미술관’ 그리고 ‘(작업의 바탕이 된)작가의 고향’ 세 가지의 꼴라주가 되겠습니다.

단순히 컬렉션들을 모아놓고 보여주는 미술관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의 작품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하게 하는 미술관이 되기를 바랬던 건축가의 마음.

미술관이 굳이 (찾아가기도 힘든) 화가의 고향에 들어서야 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건물의 이름은 ‘이응로 미술관’, ‘이응로 기념관’이 아니라, ‘이응로의 집’.

 

이응로의집/02

나무 널판 마감의 벽인데, 멀리서 보면 따스한 느낌을 주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좀 물렁한 느낌입니다. 아무래도 콘크리트나 철판에서 느껴지는 견고함이나 묵직함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요.

그런 측면에서, 이 건물의 이 장면에 이 재료가 이런 식으로 쓰여져야 했는지는 조금 의문입니다.

바닥은 테라죠 마감. 예전에 학교 복도에서 접했던 것인데, 요즘은 보기 힘듭니다. 타설한 뒤 반질반질 갈아내는 과정에서 오염물질이 발생한다는 이유도 있고요, 싸고 편하게 쓸 수 있는 다른 마감재료가 많이 나오기도 했고요.

테라죠는 타일이나 마루 널판처럼 구조체에 덧씌워진 느낌이라기 보다는 구조체와 한 몸이 된 듯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그런 느낌이, 나중에 보게 될 내부 공간의 분위기로 이어집니다.

나무 널판 마감의 맞은편에는 블랙 스테인리스 강판의 마감 벽면이 서 있는데, 미술관이 건설된 취지와 함께, 내부 구성에 대한 설명이 써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나무 널판과는 다른 인상입니다. 좀 더 오래, 아니, 영원히 이렇게 서 있을 것만 같은 강인한 느낌을 줍니다. 그 위에, 미술관에 관한 각종 정보가 ‘이음새 없이’ 덧씌워져 있는데, 미술관의 성격과 공간 구성 또한, 블랙 스테인리스 강판과 함께 영원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듯 합니다.

017

미술관 평면.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단순하고 명쾌한 구성입니다. 다른 건물에서도 여러 번 본 듯한, 낯 익은 구성이기도 하고요.

진입 로비와 사무실, 화장실, 강당, 수장고 등으로 이루어진, ‘서비스공간’과…

전시실로 들어서기 위해 거쳐야 하는 ‘사이 공간’ 혹은, ‘매개 공간’ 그리고,

 

‘전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전시 공간’ 못지 않게, ‘매개 공간’이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면적으로도 아주 넓게 설정되어 있거니와, 공간의 정교함으로도 또한 그렇습니다.

건축가는 화가가 남긴 직접적인 작품 못지 않게, 공간으로도,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아니, 작품이 아닌 공간을 통해 전달할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