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시문여는방법

늘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다 보니 지하철에 관련된 각종 디자인 소품들을 눈여겨 보게됩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 직후, 사고가 났을 때 차량의 문을 어떤 식으로 열게끔 만들 것인지, 그리고 그 방법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에 대해 잠깐 “범국민적인” 관심이 모아졌다가 이내 흐지부지되었는데요.

여러가지 소품들 중, 우선 “비상시 문여는 방법”에 대해 다루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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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지하철 6호선 객차 내부 모습인데요.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노선이고, 차량 내부의 전반적인 디자인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만, (참조글참조) “비상시 문여는 방법”에 관련된 디자인은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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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높이 문 옆에 이런 안내판이 붙어있는데요.
정말 “작심”하고 공부하지않는 한 이해하기 힘들게 되어있습니다.
아무튼 왼쪽에 화살표가 있는 걸 보니 그림상의 이런 장치들이 밑에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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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촌스럽게 커다란 화살표가
“출  입  문  비상 콕크” 를 가리키는 것이 보입니다.

늘 느껴왔던 것이지만, 단어를 틀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띄어쓰기 하는 것(“출입문”을 “출  입  문” 으로 표기하는 것)도 공공디자인의 수준을 낮추는, 타성에 젖은 습관들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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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맘먹고 “출  입  문 비상 콕크” 를 열어보았습니다.

우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허리를 굽혀야 하니 몸이 불편하고, 얇은 철판으로 된 문을 보니 잘못하다 손이 베이기라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조금 섬짓한 기분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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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거의 바닥에 붙이다시피 해야 안에 있는 “출  입  문  비상 콕크” 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가스밸브처럼 보이는 저것입니다.

한 손으로는 철문을 위로 들고 있어야 하고, 그다지 내키지 않는 마음을 무릅쓰고 쇠 상자 속 깊숙히 나머지 한 손을 넣어 밸브를 돌려야 합니다.

저 밸브를 잠그면 양쪽에서 문을 밀고 있는 압축공기의 유입이 멈추어지면서 수동으로 문을 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훤하게 불이 켜져 있고, 시간의 제약도 없는 평상시에도 조작하기 참 힘든데,

갑자기 열차가 멈추고, 내부의 조명이 꺼지고, 주변에서 매캐한 연기도 나고,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와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진짜” 비상시에는 어떻게 출입문을 열 수 있을 지, 상상이 잘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출퇴근시간 사람이 가득 차서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들 경우라면, 몸을 구부려서 문을 열고 밸브를 잠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 입니다.

처음부터 정말로 비상시에 누구나 출입문을 열 수 있게 디자인된 것이 아니라, (지하철의 유지 관리에 관련되는) 소수의 전문인력들을 위해 디자인된 장치들입니다.

사실상 비상시 출입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시뻘건 화살표와 안내판을 붙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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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1호선의 객차 내부인데요, 노선은 오래되었지만 약 1,2년 전부터 새롭게 디자인된 객차들이 도입되어 운용되고 있습니다. 조금 흔들려서 잘 나오지 않은 사진이지만 예뻐보이려 찍은 사진이 아니니, 그냥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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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과 조작 장치가 함께 눈높이 문 옆에 붙어 있으니, 앞서 다루었던 6호선 보다는 한층 발전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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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분량의 큰 글자와 큼지막하게 그려진 그림이 보기에 시원시원하고 이해하기도 그렇게 어렵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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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안내판에서 “카바”라고 설명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카바”를 열지 않고도 내부의 장치를 미리 알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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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으로 “카바”를 들어 올리니 안에 있는 손잡이가 나옵니다.

자석이 설치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약간의 저항을 느끼며 여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손잡이를 확인하고 조작하는 동안 계속 한 손으로 “카바”를 들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감점을 주어야 하겠습니다.

사소해보이는 이런 것들이 비상시에는 치명적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평소에 장난으로, 혹은 몰이해로 인해 잘못 작동될 수도 있으니 “카바”를 달아 놓은 점이 이해가 되긴 하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는 비상시를 염두에 둔다면 역시 이런 “카바”도 없는 편이 낫겠습니다.

장난이나 오작동이 염려가 된다면, 평소보다 좀 더 강한 힘으로 손잡이를 작동시키는 식으로 장난을 방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돌리는 식으로 설정된 손잡이의 작동 방식도 감점사항입니다. 오른쪽으로 돌려야 할 지, 왼쪽으로 돌려야 할 지, 사전의 지식과 교육 없이는 알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은행문을 밀고 나가려다 못 나가서 붙잡힌 강도의 이야기를 뉴스에서 접하곤 합니다.
은행문은 당겨서 열고 나가게끔 설치되어야 한다는 규칙은 건축디자인의 측면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이고, 또한 은행을 이용하는 보통사람들 중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급한 상황에서는 인위적인 교육과 경험에 의한 지식은 제대로 작동되기 힘든 법입니다.

그래서 특히 이러한 안전장치의 작동방식은 별다른 교육이 필요 없이 직관적으로 오해 없이 쉽게 열 수 있게끔 디자인되어야 할 것 입니다.

앞서 보여드린 지하철 6호선의 경우는 “디자인이 아직 되지 않은” 상황이고, 바로 위의 지하철 1호선의 경우는 “디자인이 되긴 되었는데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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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생각이 나서, 예전에 잠깐 파리에 머물렀을 때 찍었던 사진들을 뒤적여 보았습니다.
파리 지하철 13호선 객차 내부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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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손잡이 옆, 약간 위에 빨간 손잡이가 붙어 있습니다. 키 작은 어른이라도 까치발을 하면 닿을 높이입니다.

별다른 설명이 주렁주렁 달리지 않아도, 그냥 척 보기에 저 빨간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기면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직관적으로 작동 방식이 이해되는 것입니다.

손잡이를 왼쪽으로 열지 오른쪽으로 열지, 밀어야 할 지 당겨야 할 지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손잡이의 모양이 당겨서 들어올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빨간 색으로 칠해져 있고, 아이들이 장난치기 힘들게 높이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비상시에 쓰기 위한 장치인 것 같습니다.

가려져있지 않고 훤히 보이는 곳에 설치된 것으로 보아 보통 사람들도 그 비상시에 쓰라는 것 같습니다. 아하! 문 바로 옆에 있는 것으로 보아 비상시에 저 손잡이를 당기면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카바” 없이 조금 위에 달려있는 손잡이를 힘껏 잡아 당겨서 작동시키는 방식이 “비상시 문 여는 방법”에 어울리는 방식입니다.

다급하면 다급할수록 “카바” 벗겨내는 방법이나 손잡이 돌리는 방향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법이지만, 평소보다 조금 더 센 힘을 발휘하기는 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니라,누가 시키지 않아도 평소보다 더 센 힘을 발휘하겠지요.

아이들 손에 닿기 힘든 높이에 손잡이를 달아놓아서 오작동을 방지했다지만, 정작 비상시에 아이들은 저 손잡이를 어떻게 작동시킬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지하철 객차에 비상 손잡이를 작동시킬만한 어른 하나 없이 아이들만 있을 때가 흔히 있을까요?

감각적으로 잘 꾸며놓은 것을 좋은 디자인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엄밀히 말해서 감각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이고요.

스타일이나 트랜드도 세월따라 흘러가는 것이니, 스타일 사이에 우위를 평하기 쉽진 않습니다.

물론 어떤 스타일을 제대로 구사했느냐를 가지고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지만,
정해진 스타일을 정해진 문법에 맞추어 구사하는 것이 그렇게 아주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디자인과 예술의 차이점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실제로 사용되고 작동된다는 점이 그 차이점들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디자인이라는게 얼핏 이런저런 장식을 달고 색깔을 칠하고 꾸미는 것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작동방식”을 설정하는 것이니만큼,

보통 사람들의 생활, 생각, 삶의 방식을 어떻게 구체화하여 제대로 구현해냈느냐가 디자인 평가의 가장 유효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비상시문여는방법”에 관련된 우리나라의 지하철 디자인은 아직 높은 평가를 받긴 힘든 것 같습니다.

2 Comments

    1. 응 고맙다. ‘어느게으른건축가의디자인탐험기’에 실렸던 내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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