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젤]비트라-하디드소방서01

바젤에서의 마지막 날, 비트라 단지에 구경갔어요.
(바젤에서의 건축이야기의 마지막은 아니구요. 그냥 당장 소방서 사진들이 정리가 되어서 일단 올립니다.)

건축설계업에 종사하는 사람치고는,
건축여행을 굉장히 안 한 편입니다.
성격이 게으르기도 하거니와,
경제적 여건이 그다지 좋지도 않아서요.

아무튼, 그래도 몇 주 동안 유명하다는 건물들을 찾아다니면서 느꼈던 점은,
확실히 유명한 건물들은 유명한 이유가 있더라는 것이죠.

모든 유명한 건물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예를들어 마리오 보타의 건물들은 진짜 꽝이었죠.)

접하면서 느낌이 팍… 오는 거 있죠….
압도당하는 느낌.

방금 전에 올린 피터메리안 하우스도 좋았었지만.
그리고 헤르조그의 건물들도 좋았었지만.

정말로 짜릿하게 느낌이 오는 건물들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어요.

페로의 미테랑 도서관도 좋았고.
몇 주 전에 갔었던 빌라 사브아도 정말 좋았고.
오늘 갔다 온 장누벨의 아랍문화원도 압권이었는데.

하디드의 소방서도 참 좋았단 말이죠.

(진짜 영양가 없는 장황한 넋두리가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네요. 그쵸?
막무가내로 어디 참 좋았고, 어디 참 별로였고, …
그 거 구경다닌 걸 지금에서야 자랑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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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인가의 참가비를 내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비트라 단지 건축견학 가이드 투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비트라는 아주 유명한 가구 회사입니다.
디자인 책 등에서 나오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의자들 중 상당수가
비트라에 의해 생산, 판매되고 있습니다.

비트라의 공장단지가 바젤 옆 독일 땅에 있는데.
이런저런 공장들과 함께,
전시장이라던지, 게스트하우스라던지, 소방서 등의 건물들을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들에게 하나씩 디자인을 맡겨서,
이른바 명품건축의 집합단지로 만들어서,
꽤 유명한 관광상품으로 승화시킨 경우입니다.

가운데에서 눈을 비비고 있는 흰 코트의 아주머니가 가이드.

알바로 시자가 디자인한 공장 건물에 대해서 한참 설명중.
알바로 시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이지만, 성품이 아주 신사적이기 때문에,
자청해서 별로 재미가 없는 공장 건물의 디자인을 맡았고,
마담 하디드의 소방서 건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어쩌구 저쩌구 일부로 소박하게 디자인을 했다….
그리고 기존 공장건물과의 연계를 위해,
일부러 후진 재료를 사용했다.

듣고 있자니, 아주 조금씩 감동이 느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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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본 장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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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콘크리트 캐노피가 이렇게 철제 구조물들로 위태롭게 지탱되고 있었는데요.
철제 구조물들이 캐노피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보통은 아시다시피 앵커로 고정된 스틸 플레이트 위에 철 구조물을 용접하는 식인데..
(작업순서는 그게 아니지만, 아무튼)

스틸플레이트가 매입되어 콘크리트와 같은 면을 이루고 있는데요.
그게 구조재인지,
아니면 콘크리트를 연결시키는 다른 앵커꼭다리 등을 감추기 위한 마감을 위한 플레이트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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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캔틸레버 캐노피와 본체가 맞닿는 부분에는 이렇게 “필요이상의” 복잡한 형상이 발견되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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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냐면요.
소방서의 전등 스위치 조작반입니다.
건물의 구조를 아주 추상화한, 하디드 특유의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하지만 아주 정교한 드로잉 위에다가, 전등들의 스위치를 해당 위치에 배치해 놓은 것이죠.

그런데 중요한 선들이 지워져 있더라구요.

물어보니까, 아주 중요한 지적을 했다면서,
선들이 자꾸 지워져서 마담 하디드에게 매년 수선을 해달라고 문의를 하는데,
응답이 없다네요.

정작 지어진 건물들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텐데.
그리고, 이 건물은 하디드로서는 아시다시피 제일 처음으로 실제로 구현된 건물일텐데.
그 정도 서비스는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무튼 드로잉과 앙증맞은 전등스위치들을 계속 바라보다 보면,
한마디 하게 됩니다.

“……미친년….”

(앗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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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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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칸막이 문이 반투명이고, 아주 부드럽고 세련되게 열고 닫히는 슬라이딩 방식이고.
반투명이라 노크할 필요가 없더라는 이야기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지요.

오른쪽 사진은 안에 들어가서 변기 위에 앉아서 정면을 찍은 사진인데요.
칸막이 벽들과 문이 조금씩 기울어져 있어서,
기묘한 느낌이 듭니다.
실제로 들어가 있으면, 배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럽고 미식거리게 되는데요. 가이드가 화장실칸막이 안에 있으면, 어지러워서 견디기 힘들게 된다고 하길래. 모르모트 역할을 자청해서 들어가서 찍은 사진입니다.

멍하니 있었는데… 일이분이 지났을까….
가이드가 기겁을 하면서, “그래, 너 챔피언이다. 너 참 오래 버티는구나!!!!” 는 식으로 말하면서 수선을 떨더군요.

변비환자들에게는 악몽의 화장실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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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저러한 이유로, 이 건물은 소방서로써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입니다만,

샤워꼭지를 돌리자, 여전히 물이 나오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어요.

아무튼, 빌라 사브아에서도 그랬는데.
이런것을 보면 아주 반갑고 좋은 느낌이 듭니다.

“너, 살아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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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단련실.
아주 역동적인 공간이구요.
직각으로 올라간, 제대로된 벽은 하나도 없습니다.
위 사진…. 이 장면을 가리키면서, 가이드가 한참 설명을 하는데.

“전면의 노랑벽은 저 너머로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고,
오른쪽의 유리벽은 이쪽으로 기울어져 넘어오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왼쪽의 파랑벽도 이쪽으로 기울어져 넘어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노랑벽은 어떻게 된 것이고,
유리벽은 어쩌구 저쩌구,
파랑벽은 이러쿵 저러쿵….
그래서 제대로 느껴지고 있는게 아니라,
모든 공간지각에 왜곡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고,
이게 전통적인 건축공간지각에서의 어쩌구 저쩌구에 대한 해체이고,
그래서 이게 해체주의이고…”

공간보다 가이드의 말이 더 어지러워서,
제대로 이해가 잘 안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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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안에 이렇게 조각품처럼 서 있는 것이, 개인 사물함이나 수납함입니다.
매끈하게 숨어있는 문을 열면, 안에 캐비닛이 나오고…

또 이렇게 다른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살짝 가리고 있기도 하구요.
이 건물도 지어진지 십년이 다 되어 가는데…(십년이 넘었나요?)
지금봐도 세련되고 전위적으로 보이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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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들이 슬라이딩 식이고. 기울어져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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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잉 슬라이딩 도어.. 의 처리가 참 세련되게 되어있죠.
문의 연결부위를 감추기 위한 철물이 공간 전체를 관통하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원래 용도가 소방서이니까.
아무튼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면서, 출동이다! 출동! ….
소방대원들이 바쁘게 출동준비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그럴 때에 진짜 이 건물이 멋진 배경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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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수납함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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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난간.
참으로멋진 난간과 계단들을 많이 봤지만.
그래도 제일 멋진 게 바로 이 소방서의 계단과 난간.
위에서 내려오던 난간들의 일부는 바닥에 힘차게 박혀있구요.
일부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되어 있습니다.
손스침은 내려오던 방향을 홱 바꾸어서 저쪽으로 처박혀있구요.
계단은 모두 캔틸레버식인데.
듣던바대로, 밟으면 조금씩 탄성이 느껴지는데.
그 느낌이 참으로 좋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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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의 식당에서. 식탕을 중심으로 관람객들이 모여있고.
때아닌 가이드의 강의가 시작됩니다.

“아시다시피, 마담 하디드에게는 이 건물 이전에는 실제로 지어진 건물이 없었다. 모든 디자인들이 유명한 하디드 특유의 드로잉들과 모형으로만 존재했었다. 사람들은 마담 하디드의 감각을 인정하긴 했지만, 그 드로잉들이 실제로 구현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보스, 비트라의 회장님은 마담 하디드의 능력을 믿고, 과감하게 그녀에게 디자인을 의뢰했다. 물론 그녀는 지금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건축가이고, 프릿츠커상까지 받은 사람이고, 지어진 건물이 제법 되지만, 이 건물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유명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건물은 프릿츠커상을 받은 건축가의 최초로 구현된 작품이고, 우리는 그 사실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처음에는 하디드에게 나의 보스가 은인이었지만, 이제는 거꾸로 이 건물 덕에 비트라가 받는 이익도 만만찮게 되었다. 나의 보스와 하디드, 건축주와 건축가 사이의 아름다운 인연이 맺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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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게 듣고 있는 관람객들.
놀랍게도, (그다지 놀랄일이 아닌가?) 이 관람객들 대부분이 건축과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건축에 관심이 많은 보통 아저씨 아줌마들이 애들 손을 잡고 구경와서는,
수준높은(?) 가이드의 강의를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는 것이죠.

왼쪽 사진으로 주황색 파카를 입고 있는 교헤이가 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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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드의 난간이랄지, 조명이랄지, 싱크대와 찬장, 구석에 있는 가구…
모든 것들이 일체가 되어,
하디드 특유의 감성이 녹아들어있는 감동적인 공간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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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시도적인 왜곡이 일어나고 있어서인지….
앞에 보이는 아저씨가 무슨 거인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흔히들 유럽의 여러나라들에 대해서 시샘어린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걔네들은 그냥 앉아서 놀고 먹으면서 엄청나게 돈을 벌고 있다고.
엄청난 관광수입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관광상품이라는게, 결국은 몇십년, 몇백년 전에 지어진 건물들을 놓고 자리세를 받고 있는 것인데. 참으로 부러운 것이 사실입니다만.

지금은 지금이라고 치고.
앞으로 오십년 뒤, 백년뒤에는 어떨까요?

그 때에는,
이런 소방서 같은 건물들이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어.
수많은 외국인들이 단체관람하러 오게 되겠죠.
이미 유러피안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일반인들을 위한” 관광코스가 되어 있습니다.

수백년전, 수천년전의 문화유산들도 좋고,
설악산같은 좋은 자연풍경들도 좋지만,
현재의 삶과 문화가 녹아들어가 있는,
현대 건축물들이 자랑할 만한 관광상품이 되어있는 모습을 보면 아주 부럽더군요.

그런 “현대 건축물”들이 계속 쌓이고 쌓여서,
현재와 연결된 살아있는 과거가 되고….
도시 전체가 타임캡슐처럼 되어버려서….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큰 마음을 먹고 생색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일상생활의 일부분이 되고.
그리고 그런 가운데.
기상천외한, 한 일이백년 뒤에 존재할 법한 건물들이 여기 저기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부럽더라는 것이죠.

지금은 변명거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강대국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바람에,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식민지배를 받았고,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해방이 되었고.
그 덕분에
냉전체제에서의 대리전쟁… 그것도 아주 엄청난 대리전쟁을 치르기도 했고,
(625전쟁동안 소비된 화약의 양이 2차세계대전동안 소비된 화약의 양보다 많다는 사실 알고 계십니까? 하긴, 그 화약의 양을 또 다시 넘어서는 것이 베트남전쟁때 소비된 화약의 양입니다.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되는 것이죠.)
급속한 근대화를 겪기도 했고.
그래서 우리 생활을 의미있게 회상하고 가꾸어 나가고, 그러면서 여유있게 미래를 꿈꿀 기회가 별로 없었다고. 그냥 그게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의 모습이라고.

그런데, 일 이백년 뒤에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뭐, 우리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관광객들에게 보여줄 만한게,
더이상 기능을 하지 않고 박제화 되어버린, 그것도 몇 개 안되는 수백년전의 궁궐들이나,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름다운 산 말고,
뾰족한게 없는 상황이라면…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요.

….

어어… 참나.. 밤에 글을 써서 그런가… 어울리지 않게 감상적으로 글이 흘러가네.

이런… 설교조의 고리타분한 글이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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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조그의 수바빌딩에서 잠깐 언급한 유리루버식 창문.

재미있고 좋은데, 잘 모르겠어요. 이게 우리나라 건물에서 쓰인다면 어떤 자리에 어떤 식으로 쓰일 수 있을까…

손등에 붙여놓은 것은  가이드 투어 영수증 스티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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