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면수 주전자

몇 달 전, 지인들과 동경에 잠깐 놀러 다녀왔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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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시나 호리이’ 라고, 롯폰기 근처, ‘아자부쥬반’ 이라는 동네에 자리잡은, 유명한 소바집에 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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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닛신(청어)소바’를 시켜 먹었더랬죠. 훈제한 청어를 따끈한 간장국물의 소바 위에 얹어서 내오는 음식이었는데, 살짝 비릿하고 짭짤한 맛이 메밀과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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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눈길을 끈 것은, ‘면수’를 담은 주전자였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면수’는 ‘메밀면을 끓이고 남은 물’인데, 메밀향이 담긴, 뜨겁고 조금 찐득한 물입니다. 평양냉면 즐겨 드시는 분은 잘 아실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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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게 조금 이상하게 생겼습니다. 비교하기 위해 왼쪽에 보통 주전자를, 오른쪽에 ‘면수 주전자’를 간단히 그려보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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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이를 쥐고 주전자를 기울여서 컵에 따라내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손목을, 평소에는 사용할 일이 없을 방식으로, 낯선 방향의 축으로 한껏 꺽어서 기울여야 합니다. 물이 나오는 구멍의 방향을 의식해서 손목을 꺾는 것도 쉽지 않고, 그렇게 꺾은 채로 손목을 돌려서 주전자를 기울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몇 번 따라 마시다 보면, 손목을 스트레칭해서 풀어주는 듯한 효과까지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디자인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뜨거운 면수를 주의를 기울여서 조금씩 따르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친절히 알려주거나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누구라도 저 주전자를 손에 쥐고 기울이다 보면,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따르게 되거든요.

미식가들은, 메밀국수에 함께 내오는 면수를 나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소바든, 평양냉면이든, 음식을 기다리는 사이, 뜨끈한 면수를 따라 마시면서 잠깐의 허기를 달래는 시간을 작지 않은 즐거움으로 여긴답니다. 면수를 조심스럽게 따르다 보면 뜨거운 물을 엎지르는 등의 안전사고를 막을 수 있겠고요, 더 나아가, 면수를 마시는 즐거움을 조금은 더 각별히 느끼게 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고 보니, 보통의 주전자와는 많이 다르게 생긴 겉모습부터, “이 안에 담긴 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특별한 물입니다.” 라는 말을 하는 듯도 합니다. 

본질적인 의미를 무리 없이 담아서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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