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일기

주) 이 글은 건축공학과 교우회지에 기고되어 실리게 될 글이다. 블로그에 먼저 올려 본다.


잃어버린 일기

일기를 쓰던 때가 있었다.

초등학생 때 썼던 일기는 강요에 의해서 작성되고 주기적으로 내용을 검사 받았기 때문에 진짜 일기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기억으로는, 중고등학생 때에는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일기”를 썼던 것 같다.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보편적으로 겪었을 고민거리에 관련된 일기의 내용이 단편적으로나마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썼던 것 같다” 라던지, “기억이 난다.”고 말하는 이유는, 지금은 그 일기들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되고 얼마 후에, 중고등학생 시절의 일기들을 깨끗하게 없애 버렸다. 어설픈 열정, 과잉된 자의식, 대책 없는 순진함의 흔적들이 너무나도 부끄럽고 낯뜨거워서, 당시로서는 모든 일기장들을 완전히 없애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 줄 것도 아니며 정말로 보기 싫다면 본인이 안 보면 그만이었겠지만, 그런 설익은 감정들이 내 책상 서랍 속 어딘가에 놓여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모든 일기들을 깨끗하게, 흔적 없이, 깔끔하게 없앴다. 지금은 그 당시의 일기장들이 모두 몇 권이었는지, 어떤 형식의 노트였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의 중고등학생 시절의 기억들은 그렇게 폐기되었다.

동대문 운동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지난 4월에 완료된 동대문 운동장 야구장 철거에 이어, 6월 30일에는 축구장까지 철거될 예정이라고 한다. 요즈음 하도 큰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고 안팎으로 워낙 뒤숭숭한지라 이 정도의 소식은 모르고 지나치기 쉬울 정도로 사소한 뉴스이지만, 살펴보니 동대문 운동장 철거에 관련되어 나름대로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동대문 운동장의 철거계획과 디자인센터 건립계획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확인할 수 없는 구린 루머 속에서 유명 해외 건축가의 제안이 당선되었을 때, 행정소송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편법으로 철거를 시작했을 때, 그 모든 중요한 고비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다소의 잡음과 희미한 이의제기가 있었다. 아마추어 야구협회는 동대문 야구장을 대체할 수 있는 시설 건립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였고, 소수 아마추어 야구 애호인들을 비롯한 일부 시민들은 동대문 운동장에 서려있는 온갖 추억들과 기억들을 아쉬워하며 소박한 다큐멘터리 동영상을 만들어 웹에 올렸다. 운동장과 함께 살면서 운동장과 함께 늙어가던 스포츠용품 상인들은 새롭게 세워질 디자인 센터의 일부 공간이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남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건축설계사무소의 직원들은 드디어 서울에도 “자하하디드” 작품이 들어서게 되었다며 흥분하는 한편으로 “애초부터 유명 해외 건축가의 제안이 당선되기로 정해져 있었다”는, 확인하긴 어렵지만 충분히 개연성 있어 보이는 소문을 뒤에서 힘없이 수군거렸다. 이 모든 사소한 소란들을 가볍게 물리치며, 80년 넘게 서울 한복판에 우뚝 서서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수 많은 추억들을 한 몸에 품어왔던 동대문 운동장은 거짓말처럼 말끔하게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신기루였던 것처럼.

동대문 운동장은 거대하고 조잡한 콘크리트 덩어리였다. 둥근 외벽을 따라 의미 없이 지루하게 반복되던 둥근 모양의 아치 창문들이 유치해 보였다. 바깥에서 훤히 들여다 보이던 계단식 스탠드의 아랫면은 투박하고 답답하게만 느껴졌고, 도로경계선 바로 턱 밑까지 바짝 붙어 서있는 거대한 모습이 다소 뜬금없고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페인트가 덕지덕지 칠해진 제물치장콘크리트 마감은 가볍게 빛나는 금속패널처럼 상쾌하지도 않았고 안도다다오의 노출콘크리트처럼 깔끔하게 묵직하지도 않았다. 후줄그레한 콘크리트 덩어리 위에 부분적으로 “관광안내소” 따위의 조잡한 껍데기가 새롭게 덧씌워진 모습은 흉물이라 해도 큰 과장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유쾌하고 기분 좋게 탄생한 시설도 아니었다. 1926년 3월, 일본 왕세자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일제가 동대문 옆 성벽을 허물고 경성운동장을 지은 것이 동대문 운동장의 시작이었으니 말이다.

늘어만 가는 요구조건들을 한정된 도시 공간 안에 소화해 내기 위해서는, 과거의 모든 기억들을 영원히 남겨 놓을 수 없음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새로운 술은 새로운 부대에 담아야 한다. 변화하는 삶에 맞추어서 삶을 담는 도시도 변해야 한다. 변하지 않는 삶은 죽은 삶이고 변하지 않는 도시는 죽은 도시다. 더군다나, 어설픈 공존과 화해보다는 완전한 결별, 완전한 파괴에 한결 더 익숙한 대한민국에서 이 정도의 사건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동대문 운동장은 새로운 삶의 요구와 새로운 장소의 힘을 담아내기 위해 그냥 깔끔하게 없애버리기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사건들과 기억들이 너무나도 깊이 배어있는 시설이었다. 잠실운동장이 생기기 전까지 60여 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열렸던 대규모 행사의 대부분은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다. 볼거리도 없고 놀이 문화도 척박하여, 매해 어린이날마다 수 천명의 어린이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오토바이 스턴트쇼를 열었던, 무척이나 가난했던 시절! 앞서 언급했던 동대문 운동장의 촌스럽고 조잡한 겉모습은 번잡하고 어려운 설명 없이 그 때의 사정을 꾸밈 없이 보여주고 있었기에 보기에 좋지는 않았지만 의미가 깊은 풍경이었다.

동대문 운동장의 철거가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옛 한양 성곽 복원과 맞물려 있다고 하니 마음 한구석의 불편함은 더욱 커져만 간다. 지금 당장의 시민들의 시선으로는, 몇 십 년 전에 지어진 투박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그다지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한편으로, 수 백 년 전에 지어졌던 한양 성벽은 제법 근사하게 보일 법도 하겠다. 설령 그것이 복제품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큰 아쉬움 없이 무너뜨렸던 성벽을 한참 뒤에 다시 복원하는 지금처럼, 언젠가 큰 고민 없이 없애버린 동대문 운동장을 힘겹게 다시 복원하게 될 날이 오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무너뜨린 성벽을 80년 뒤의 후손들이 큰 재원을 투자하며 되살리려 할 것이라는 사실을 당시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서울시, 아니, 우리 모두는 시행착오를 수정하면서 동시에 똑 같은 실수를 바보처럼 반복하여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대문 운동장이라는 장소에서 구현될 수 있는 최고의 볼거리, 최고의 관광상품은 무엇일까? 자하 하디드의 건물은 대한민국 서울에서야 굉장히 희한한 건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훨씬 더 현란하고 화려한 건물들이 이미 세계 곳곳에 지어지고 있다. 지난 세기말, 열광하며 들었던 프로디지의 테크노 음악은 이미 오래 전에 구닥다리가 되었다. 물론 세월이 흘러 구닥다리가 되더라도 자하 하디드의 작품은 그것 나름대로 적지 않은 의미가 있을 것이겠지만, 그리고 그렇게 쉽게 구닥다리가 되지도 않을 것이지만, 80여 년 동안의 기억을 말끔하게 지우고 얻은 대가라고 하기엔 아무래도 밑지는 장사처럼 느껴진다.

세상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대한민국 서울의 동대문 운동장이라는 장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자하하디드의 우주선 같은 건물이 아니라, 성벽을 부수고 운동장을 지었다가 다시 운동장을 부수고 성벽을 되살리고야 마는 우여곡절, 성취와 상실이 거칠게 교차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몇 백 년 전의 흔적과 몇 십 년 전의 기억, 그리고 지금의 빛나는 삶이 치열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공존할 수는 없었을까? 무형의 가치들이 유형의 스팩터클을 보듬어 볼거리를 뛰어 넘는 이야깃거리를 빚어내게 할 수는 없었을까? 프랭크 게리의 “빌바오 효과”를 어깨 너머로 훔쳐보며 “자하하디드 효과”를 꿈꾸는 대신, 세상 어느 곳에도 없는 “동대문 현상”을 드러내어 “동대문 효과”로 승화시킬 수는 없었을까? 그러한 지혜로움이 구현되기를 바랬다면, 필자의 욕심이 너무 큰 것이었을까? 현상 설계에 참여했던 몇몇 국내 작가의 제안에서 그런 발상을 발견할 수 있었기에 아쉬움과 불편함은 더 커져만 간다.

처음에 꺼냈던 중고등학생 시절의 일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보자.

필자는 가끔씩, 없애버렸던 그 일기장들이 아직 책상 서랍 속 어디엔가에 남겨져 있다면 참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세상을 살면 살아갈수록 자꾸만 작아지기만 하는 꿈을 발견하며 용기와 위안을 얻고 싶어질 때마다, 투박하고 유치했던 그 일기가 적지 않은 힘이 되어 주었을 것이라 상상한다. 온 세상이 두렵고 낯설게만 느껴졌던 꼬마 시절의 필자도 필자였고, 폭풍 같은 사춘기의 한 가운데에서 낯뜨거울 정도로 열정적이었고 유치할 정도로 순진했던 필자도 필자였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롭게 깨닫는다. “성숙한 인격”이라는 것은 아무런 결점도,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는 완전무결한 인격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 것이다. 자랑스럽고 좋은 기억을 소중하게 여기는 동시에, 부끄럽고 외면하고 싶은 기억 또한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간직할 줄 아는 마음, 인생의 모든 순간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성숙한 인격을 갖추기 위한 중요한 조건들 중 하나라고 믿는다.

서울의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마치 중고등학생시절의 일기장들을 없애버린 필자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묘한 기분이 들 때가 많다. 몇 백 년 전에 세워진 유명한 건물들은 비교적 잘 모셔지고 있고 (남대문의 경우는 예외로 생각하는 것이 맘 편하겠다.), 최근에 지어지고 있는 새 건물들은 날이 갈수록 화려해지고 있지만, 그다지 멀지도 않으며 그렇게 가깝지도 않은 과거를 실감할 수 있는 흔적들은 가면 갈수록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희미해져만 가는 흔적들이 가리키는 시기는, 현실에 대해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껄끄러웠던 시기와 묘하게 겹쳐지는 듯도 하다. 아직도 우리는 특정 시기의 역사를 당당히 대면하기를 꺼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 껄끄러움을 무관심인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필자가 없어져 버린 지난 일기장들을 아쉬워하는 것처럼, 언젠가 서울시민들이 없어진 동대문운동장, 그리고 조만간 없어지게 될 세운상가, 낙원상가를 그리워하게 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조금이라도 더 성숙하게 될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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