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건축가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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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문화재단’으로부터 의뢰를 받아서, ‘건축신문’ 13호에 간단한 원고를 기고했었습니다. 얼마 전 확인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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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의 일’이라는 이슈를 이루는 네 글 중 하나로 실렸는데요.

(‘디자인하는 건축가, 건축하는 디자이너’라는 제목은 편집자가 지은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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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하단에 실린 건축가 이진오의 책상 풍경 사진 또한, 편집자가 넣은 것입니다.)

나름 하고픈 말을 다 하긴 했는데, 읽기에 조금 어색한 글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듭니다. 아마도 ‘똑똑해보이고 싶다’는 속마음 때문에 다소 딱딱하고 거친 글이 된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평소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신 ‘정림문화재단’에 감사드립니다.


건축가의 일 / 천경환

<건축가가 디자인하는 명함>

건축가라 자처하며 지낸 지 몇 해가 흘렀는데, 아직 의뢰가 많지 않아서 시간이 남을 때도 있다. 마침 이런저런 것들을 궁리하고 디자인하는 것을 좋아해서 가구나 명함 같은, 건축설계가 아닌 다른 분야의 디자인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특히 명함의 경우는 ‘개인 명함 캠페인’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인 정체성이 아닌 스스로가 부여하는 개인의 정체성을 건축가와 의뢰인이 함께 탐색한다는 명분을 겸하고 있다. 영문이름이나 직장이름 등을 표기하는 관습 하나하나를 의심하며 정말로 드러내고 싶은 것들만을 골라낸다든지, 여백의 개념에 구애 받지 않고 지면전체를 활용하여 정보를 배열한다든지, 명함의 앞 뒷면을 두 개의 분리된 평면이 아닌 서로 간섭하고 관통하는 두 공간의 경계로 해석한다든지, 글자가 의미가 아닌 형상으로 드러나는 순간에 주목한다는 것 등이 명함 디자인에 대한 나름의 태도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그래픽 디자이너가 아닌 건축가로서의 기질이나 스타일이 은연중에 배어 나오길 기대하는 것이다. 늘 의식하는 것은, ‘그래픽 디자이너가 아닌 건축가로서 명함을 디자인한다는 데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라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기대하는 답변이 나올 때도 가끔은 있다. “이유를 콕 짚어 말하기 힘들지만, 왠지 건축가가 디자인한 명함답다.”라는 식의 반응으로 말이다.

건축가로서 다른 분야의 디자인을 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전문 디자이너가 아닌 건축가에게 의뢰하면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작업이 건축가로서 건축설계를 하는 데에 어떤 도움이나 영감이 될 수는 없을까? 중심이 아닌 경계를 짚어보는 질문들일 텐데, 나는 역설적으로 여기에서 ‘건축가’의 의미와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건축가는 어떤 사람인가>

‘건축가’는, 그 호칭을 얻기 위해서 ‘자격증’이 아닌 스스로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그 호칭을 계속 지켜 나가기 위해서는 한 번의 합격이 아니라 꾸준한 관리와 자신의 작업 스타일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만한 작품목록(포트폴리오)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예술가’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일단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여러 대답들 중 현실적으로 가장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전시의 대상이 된다. 2. 비평의 대상이 된다. 3. 공인된 시장에서 꾸준히 거래된다.

여기에 기대어 ‘예술가’의 정의를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다. 전시와 비평의 대상이 되는, 그러면서 공인된 시장에서 꾸준히 거래되는, 어떤 무엇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 작품이 아닌 스스로가 비평과 전시의 대상이 되고 스스로의 이미지가 거래의 대상이 된다면, 삶 자체가 예술이 될 것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예술가라 할 만 하겠다.

같은 맥락에서 현실적으로 유효한 ‘건축가’의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건축의 전시와 비평은 대개 잡지와 학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건축가는 잡지에 실리는, 그리고 학계에서 이야깃거리로 삼는 건축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건축이 거래되는 시장(예를 든다면 판교 단독주택단지 건축주 커뮤니티?)에서 통하는 ‘건축가 리스트’에 들어갈 만하다고 평가되는 사람이다.

비평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담론을 이끌어낸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것, 또는 언뜻 익숙해 보이지만 어떤 관점에서는 낯선 무엇. 더 나아가, 새롭거나 낯선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가까운 미래에 보편성을 얻을 가능성과, 기나긴 건축 역사의 흐름 속 어떤 갈래의 연장선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감 속에서 담론은 생겨난다.

<불분명한 경계>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조건들이 다분히 주관적이고 애매하다는 사실이다. ‘공인 자격증’의 경우에는 취득해야 하는 학위와 실무경력 연차 같은, 다른 해석이나 오해의 여지가 없는 객관적인 조건의 벽이 있으며, 품질과 독점 영역을 일정하게 관리하기 위해 그 벽을 엄격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방금 언급한 예술가와 건축가를 규정하는 틀은 아무래도 모호할 수 밖에 없다. 비평의 대상이 된다든지 담론 현성에 도움이 된다는 식의 개념은, 어떤 자격이나 정체를 규정하기 위한 조건으로 삼기에는 너무나도 애매하고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의미와 가능성을 찾기 위해 우선 경계를 짚어보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심은 불분명하고 경계는 두툼한데, 게다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소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자격과 정체의 모호함에서 오는 혼돈은 사실은 흔히 겪는 상황이다. 가령 유명 가수나 영화배우 같은 사람들이 화가나 사진가로 자처하며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고, 더 나아가 대형 갤러리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전시, 판매하기도 한다. 기존의 비평가나 예술가들로서는 못마땅할 수 있다. 예술가로서의 교육 배경이 없고 미술의 역사나 양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입장이라 맥락에 대한 공감대를 찾을 수 없는데, 대중연예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필요 이상의 주목과 가치 이상의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의 불만은 어떤 면에서는 타당하지만, 동시에 기존의 맥락에서 벗어나있다는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잉태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다른 배경에서 출발했지만 함부로 무시 받지 못할 정도의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고 더 나아가 전시도 하고 판매도 하는, ‘예술가인 듯 예술가 아닌 예술가 같은’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건축 또한 마찬가지다. 건축에는 (회화나 사진 보다 훨씬 더 견고한) 전문 지식과 기술의 장벽, 그리고 윤리적 책임이 존재한다. 하지만 건축은 일상 생활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그런 장벽이나 책임이 무색해질 때도 있다. 누구나 늘 건축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건축에 대해서 얼마든지 참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얼마 전 광화문 교보타워 옆 청진2,3지구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애초에 이 건물의 ‘건축가’라고 알려진 사람은 대형 포털 사이트의 검색창 디자인으로 널리 알려진, 스스로를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라고 규정한다는 분이었다. 이에 대해서, 디자인의 일부를 주도했다고 해서 정규 건축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고 건축 실무 경력도 없는 그를 그 건물의 ‘건축가’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분명 ‘건축물의 설계’라는 활동 중에서 보통사람들이 흔히 이해하고 있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은 극히 일부분이라 말할 수 있다. 건축가의 역할에 대해 규정하자면, 어떤 것을 예쁘게 디자인한다는 의미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여러 이해당사자들과 전문기술자들을 중재하고 통솔하여 종합적인 해결책을 이끌어낸다는 의미로, 훨씬 더 넓게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건축가들이 믿고 싶어하는 그런 ‘건전한’ 인식과 상관 없이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얼핏 보기에도 그 건물이 주변의 다른 건물들과는 ‘아주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것(달라 보인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차별되는 지점이자 존재이유이고, 엇비슷한 디자인 제안들 속에서 지루해하고 있던 건축주를 설득할 수 있었던 유력한 무기였으리라는 사실이다. 얼핏 귀엽고 친근한 인상을 주지만 (‘건축가’들에게는) 그다지 아름답거나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기존 건축가들이 사용하는 흔한 어휘와 문법에서 벗어나 보인다는 점에서, 그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가 건축설계를 진행하는 방식과 태도가 평범한 건축가들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짐작할 수 있다.

<함께 건축가가 되고 싶다>

이것은 건축가가 뭐라 말하든 상관 없이 더 이상 막거나 터부시할 수 없는 상황으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앞으로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든, 기존의 ‘건축가’와는 다른 배경과 다른 작업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 마땅히 건축가가 할 일을 맡아서 기존의 건축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하는 모습을 점점 더 자주 보게 될 것이다. 건축설계를 하면서 해야 할 수 많은 일들 중 겉으로 드러나게 화려한 일들을 그들이 할 것이다. 그리고, ‘높은 완성도의 비슷한 것’ 보다 ‘적당한 완성도의 아주 새로운 것’에 훨씬 더 크게 환호하는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지어진 건물을 그들의 작품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공인된 시장에서 꾸준히 거래될 것이고, 전시와 비평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건축가’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런 현실은 위기인 동시에 기회다. ‘우리’와 ‘그들’의 차이점을 살펴보면서 ‘건축가’ 본연의 역할이나 고유한 기질, 그리고 ‘건축가’로서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던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원점에서부터 되짚어 볼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축가’ 집단이 이제까지 쌓아온 공감대에서 어디까지가 타성의 찌꺼기이고 어디서부터가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양분인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얻은 성찰을 실행을 위한 담론의 바탕으로 삼으면 될 일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끔씩 내놓는 의외의 결과물들을 넓은 건축의 가능성으로 흡수해서 활용하면 될 일이다. 더 나아가, 그들이 그들 고유의 역량을 발판 삼아 우리 영역을 침식하는 만큼, 우리도 우리 고유의 역량을 무기 삼아 다른 영역으로 뻗어 나아가면 될 일이다.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건물은 분명 그가 ‘건축가’가 아닌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이기에 가능했던 어떤 특질을 갖고 있다. 그것이 시장에서 통할 수 있었던 이유였으리라. 그렇다면 ‘건축가’가 디자인한 명함은, 그가 ‘건축가’이기에 가능했던 어떤 특질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디자인한 명함에 대해서 그래픽디자이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물론 건축가로서 내가 디자인한 명함에는, 그래픽디자이너 입장에서 마땅히 비판할 구석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비판할 구석이 건축가로서의 특질과 맞물려있을 것이기에 이야기가 더 재미날 것 같다.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명함이든 건축이든, 앞으로의 작업을 위한 좋은 양분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다.

비슷하게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건물에 대해서 동료 건축가들과 함께,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와 함께,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건축가로서 할 만한 비판을 들려주고 싶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통할 수 있었던 이유를 함께 살펴보고 싶다. 함께 건축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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