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쿠라마에

작년 10월 말, 클라이언트 뵈러 동경에 잠깐 갔었을 때의 일을 이제야 정리해서 올립니다.

아사쿠사 관광안내소를 둘러보고, 근처 ‘쿠라마에’라는 동네에 갔었습니다. ‘쿠라마에’는 우리말로 풀자면 ‘창고 앞’이 되겠는데, 아마도 예전에 큰 창고가 있었나 봅니다. 작은 공장이나 회사들이 모여있는 오래된 동네로, 서울로 치자면 을지로 정도의 성격인 것 같습니다. 요즘들어 작고 예쁜 가게들이 하나둘 씩 들어서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점도 을지로와 닮았네요.

화사한 색감의 보도블럭. 이제와 생각해보니 낡고 칙칙한 동네 분위기를 의식한 결과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칙칙하고 낡은, 작은 건물들이 모여 있었는데요.

넓은 유리창 너머에 상자가 쌓여있는 것을 보니 창고나 공장인 것 같습니다. 1층은 주차장이고 3,4,5층은 넓은 유리로 되어 있는데, 2층은 닫힌 표정이네요. 층마다 프로그램이 달라지는, 황두진 소장님이 말씀하신 ‘무지개떡 건축’인가 봅니다. 2층 벽과 3층 바닥 사이에 난 틈이 그 혐의를 더 짙게하고 있네요.

2층 상부, 3층의 발코니 난간을 박공 모양으로 표현해서, 1,2층이 상부와는 완전히 다른 기능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역시 ‘무지개떡 건축’입니다.

벽 색깔로 눈길을 끌었던 작은 건물입니다. 그리 정교하게 디자인된 건물은 아닌데, 오히려 그래서 정감이 갑니다.

지나간 유행의 타일 마감과 촌스러운 간판.

1층은 주차장이랑 가게, 2층은 (폐쇄적인 표정으로 보아) 집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주차장 폭이 저 정도만 되어도 가로의 흐름이 무난히 이어집니다.

그냥 평범한 건물들이고 딱히 디자인 잘 된 것도 아닌데, 사진을 찍어서 다듬고 새삼스럽게 바라보면 의외로 몰입하게 됩니다. 지붕 아래 작은 환기창, 간판을 겸한 발코니 난간, 간판 글자, 숨은 듯 자리잡은 편지통 등등, 작은 아이템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깃들어있는 듯한 느낌도 들고요. 고만고만한 건물들이 다닥다닥 늘어선 이런 상황의 이런 건물에서는 박공지붕이 펼치는 주장 (옆건물과는 엄연히 다른 독립된 자아로서, 가로풍경을 이루는 당당한 구성원이다!) 이 크게 와닿습니다.

구경하는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이런 재료의 이런 연출 또한 정겹게 느껴집니다. 골판은 그림자를 부드럽게 흡수하고 퍼뜨리네요. 빗물이나 녹물의 때를 무난하게 품어주기도 하고요. 역시 새삼스럽게 몰입하게 만드는 장면.

우리나라로 치면 다세대주택이나 연립주택 쯤 되는 것 같은. 층이 바뀌면서 창문 패턴이 뜬금없이 바뀌는 것을 보니, 내부 공간 구성 또한 드라마틱할 것 같습니다. 창턱과 차양을 내밀어서 요철을 만든 것도 흥미롭고요. 좀 더 구석구석 자세히 사진을 찍어놓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됩니다.

역시 새삼스럽게 몰입하게 하는 건물. 우글거리는 골판의 질감이 경쾌하고, 드리워진 그림자는 부드럽고요. 코너의 묵직한 기둥을 가볍게 감싸는 붉은 난간은 나름 ‘복합적’으로 보입니다. 피봇 방식으로 열리는 창문을 보면서는, 기성품 복합창호를 당연한 듯 쓰면서 잊고 있었던 것이 많았다는 (건축가로서의) 반성을 하게 됩니다.

차양 부근으로 튕겨지며 번져가는 햇볕을 보는 재미. 어둠의 경계에 걸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창살을 보는 재미. 그런데 내부 공간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길래 이런 창문 패턴이 나올 수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차양을 이루는 접힘 하나하나, 녹슨 창턱 구석, 가로 세로 창살을 붙잡는 매듭 하나하나 마다 각각의 영혼이 깃들여있을 것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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