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풍경]패트병으로만든벽

패트병

지난 9월12일, 광명동굴 근처에 위치한 광명업사이클아트센터에서 ‘패트병의 재발견’이라는 주제의 전시가 열렸습니다. 저는 AnLstudio의 신민재 소장님 소개로, 패트병을 소재로 작업하는 작가들 틈에 끼어서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정리해서 포스팅합니다.


시작

패트병 작업! 가구나 작은 오브제를 만드는 작업은 이미 많은 작가분들이 활발히 발표하고 있었습니다. 한달이 채 안되는 작업기간 동안, 아무런 배경이 없는 제가 불쑥 끼어들 만한 방향은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다른 작가들의 작업과는 차별되는, 건축가이기 때문에 제안할 수 있는 방향은 무엇일지 고민했습니다. 각진 패트병을 쌓아서 큰 벽을 만드는 작업이면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무난하게 쌓아 올리되 물량으로 승부하기로 했습니다. 안에 색깔있는 무언가를 넣어서 쌓는다면, 벽을 이루는 벽돌(패트병) 하나하나를 픽셀처럼 활용할 수도 있겠습니다. 메시지를 새길 수도 있겠구요.

시간이 얼마 없으니 가볍게 생각하고 얼른얼른 확인…

아직 병을 어떻게 쌓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단순하게 병을 벽돌처럼 배열하고 글자를 넣어봅니다…

커다랗고 단순한 작업이 될 것이니, 벽에 새겨지는 글자라도 최대한 ‘있어보여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벽 길이를 확인하면서 글자 모양을 계속 다듬었습니다.

문득 정말 벽돌처럼 평평하게 쌓는 것 보다는, 자잘하게 지그자그로 쌓아야 구조적으로 조금이라도 안정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왼쪽 아래 스케치)

모델링

얼른 모델링으로 여러 가능성을 검토해봅니다. 평범한 벽돌처럼 쌓기도 하고.

앞서 언급한, 스케치의 아이디어처럼 지그자그로 쌓기도 하고.

그냥 꽉 맞춰서 쌓으면 갑갑해 보일 수도 있으니, 조금씩 간격을 두어 보았습니다. 지그자그의 변 길이가 길어져 구조 안정성이 높아지는 효과도 기대되고요. 이렇게 성글게 쌓으면, 쌓아야 할 병의 개수를 줄일 수도 있겠습니다.

지그자그로 쌓되, 병뚜껑을 안으로 감추는 식으로 쌓기도 하고. 세번째와 네번째 사이에서 고민하다, 하얀 병뚜껑도 의장 요소(?)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차원에서 세번째 대안으로 결정했습니다.

세번째 대안에 글자를 새기고 전시장에 앉혀보았습니다. 맞춤처럼 딱 맞아서 놀라움.

효과를 짐작하고 스케일감을 확인.

도면

개념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만들어야 하니, 제작을 위한 도면을 그려야 합니다. 제작에 참여할 분들은 작업의 상세한 내용을 모르는 분들일 것입니다. 번잡한 현장에서 착오나 오해 없이, 정확하게 만들 수 있게끔 도와주는 도면이 필요합니다. 익숙치 않은 재료와 구성방식이라 평소에 그리던 건축도면과는 표현방식이 조금 다를텐데, 큰 틀에서의 취지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최적의 표현방식을 찾아내는 과정이 저는 참 즐거웠습니다. 도면 작업한 아르바이트 학생도, 적어도 겉으로는 즐거워 보였습니다.

나름 상세도면도 그리고, (양면테이프로 접착)

뚜껑끼리 고무줄로 묶어 보강한다는 아이디어는 이런저런 이유로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실행

아래 두 단에 자리잡을 120개의 병에는 물을 가득 채워서 조금이라도 튼튼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을 수 있도록 합니다. 전체 1,800개의 패트병에 일일히 뚜껑을 채우는 것도 큰 일이었습니다. 사실은 버려진 패트병을 모아서 재활용해야 ‘업사이클’이라는 개념에 부합할 것입니다. 하지만 1달 동안의 준비기간 동안 아이디어를 내고, 계획하고, 실제로 작업까지 해서 설치를 마쳐야 하는 여건에서는 아무래도 무리였습니다.

‘글자’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도 큰 고민이었습니다. 식용색소를 풀어낸 물, 작은 스티로폼 공, 콩 등등, 벼라별 상상을 하고 가격과 시공성(?) 등을 따져보며 검토하였습니다. 완충과 장식을 위해 선물상자 속에 채우는 종이보푸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균등하게 양을 나누고 (아이에게 국수 먹이듯) 1800개의 좁은 입으로 밀어 넣는 것 또한 큰 일이었습니다.

자리잡고 열 맞춰 쌓아 올렸는데,

정확히 수직이 아니다 보니 점점 기울어지다 조금씩 무너지더라고요.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기 위해 낚시줄로 배후의 벽에 묶어 고정하다 보니, 힘이 몰려서 거꾸로 그 방향으로 와장창 무너지는 충격과 공포.

낚시줄로 배후 벽과 전면 상부 천정, 앞뒤 두 방향으로  묶어 고정하고, 중간중간에 케이블타이로 엮어서 전시 오픈 직전 겨우 마무리. 공간이 좁고 렌즈가 후져서 정면에서는 한 씬에 다 담을 수 없었습니다.

지그자그로 자글거리는 조형이라, 비스듬히 보면 글자가 벽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효과가 납니다.

소감

앞서 말했듯 실제적인 업사이클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아직도 아쉽습니다. 보다 진보된 기술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래도 넓은 공간을 무난하게 점유하며 작지않은 임팩트를 낸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른 작가의 작업들과 함께 전체 전시의 구색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의 말씀

좋은 기회를 주신 신민재 소장님,

재료 탐구와 계획검토에 이어 설치까지 도와주신 김혜운씨,

자리에 맞춰 병을 쌓아올리는 데 도움을 주신 강봄이씨와 권솔희씨,

패트병에 물 넣고 양면테이프 붙이는 작업을 해주신 김종화씨와 김한준씨,

빈 병에 빨간 종이를 채우는 작업을 해주신 박윤선씨,

급한 부탁에 멀리서 달려와 이래저래 크게 고생해주신 정희은씨와 박은정씨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포스팅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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