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빌라사브아/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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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 옆에는 큰 거실이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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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코르뷔제가 제안했다는 “수평연속창”의 의미가 가장 실감나게 느껴졌던 공간입니다.

가운데의 경사로도 그렇고, 이 “수평연속창”도 그렇고…
특정하게 고정된 위치를 제시하지 않고 끊임없는 “떠다님”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건축가가 “움직임”(건축적 산책)을 이 집의 주된 화두로 삼았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런 짐작은 물론 자동차의 동선이 파격적으로 반영된 1층 평면계획을 통해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지요.)

그리고,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이 수평띠창은 새로운 구조시스템에 의해 변화된 벽의 의미(무게를 지탱하기 위한 벽이 아니라 단지 공간을 구획하기 위한 벽)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고,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보다 많은 햇볕을 방의 구석구석에 골고루 받아들이기 위해 고안된 결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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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창문과 비교해보면 그 의미가 좀 더 실감날 수도 있겠습니다.
당시까지 파리에서 지어졌던,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대부분의 건물들의 창문 패턴이 이런 식인데요.

사람의 어깨너비와 허리높이, 그리고 내부 공간의 천정높이를 반영하는 창문의 형상과,
건물의 구조시스템을 반영하며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창문들의 패턴은,

방 안을 서성거리며 돌아다니기 보다는(위에서 “떠다님”이라고 표현했었죠.^^)
자신이 점유한 창문 언저리의 공간에서 가만히 서 있기를 권하며
안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특정 위치, 특정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는데,
사실은 이런 확인이 건축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즐거움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서, 르 코르뷔제가 제안한 수평연속창에 대해 당시 다른 많은 건축가들이 적잖게 반발했다고도 합니다. 오귀스트 페레가 했다는 “수평연속창은 창이 아니다. 창, 그것은 인간이다!”라는 말이 대표적인 비판인데요. (에스프리누보/현대적인창의연구에대한작은공헌/1926)

그 때까지 대부분의 건축가들이 믿었던 건축의 원초적인 즐거움을 이 수평띠창이 없애버렸다는 의미에서 저런 말을 한 것이겠고,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이고, 어떤 측면에서는 지금까지도 공감이 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르 코르뷔제의 수평연속창은 그런 즐거움을 훼손하는 대신, 그 때까지는 몰랐던 다른 즐거움을 주었는데요.

오솔길이나 아기자기한 골목길을 걸어다니면서 느끼는 아늑함 대신,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질주하는 상쾌함을 제안했다고 비유한다면, 다소 과장된 설명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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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건축가가 디자인한 의자가 놓여있고,
중정을 향해 열려있는 커다란 창을 통해서는 “하얗게 빛나는 모던의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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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로는 이 시점에서 외부공간이 되는데,
“건축적 산책”을 계속하도록 유혹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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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여닫는 손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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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띠창은 안팍을 관통하며 이어지지만, 벽채의 색깔은 실내와 실외를 구분하고 있는데,
이런 점이 르 코르뷔제와 미스를 구분짓는 좋은 사례인 것 같습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미스가 르 코르뷔제보다 한결 더 “모던”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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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던 오귀스트 페레는 또한, “나는 파노라마에 공포를 느낀다.”(에스프리누보/현대적인창의연구에대한작은공헌/1926) 라도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들이, 한때는 상상 이상의 거부감을 이겨내며 성취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소한 것으로 생각되는 화두에 대해 정색을 하고 싸웠던 선배 건축가들을 생각해보면 웃음도 좀 나오고, 그들이 귀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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