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언북중학교다목적강당

아이디알건축사사무소 신작, ‘언북중학교다목적강당’ 비평이 공간지 2019년3월호 (SPACE 616)에 실렸습니다.

저는 이런 기회가 참 좋습니다. 좋은 건축가를 만나고, 좋은 건물을 구경할 기회가 되거니와,

비평글을 쓰면서 생각하는 힘이나 글쓰는 힘을 단련하는 계기도 해서요.

지면에는 분량의 한계도 있고 편집부가 원하는 글의 방향도 따로 있어서, 글의 일부가 생략되기도 했고, 뉘앙스가 미묘하게 달라진 감이 있습니다. 물론 편집부의 요구를 따라 다듬으면서 글의 완성도가 높아진 측면도 있지만, 아쉬움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최종 원고에 생략되었던 부분을 결합하여 이 곳에 올립니다. 더불어, 언젠가는 비평글이 아닌 작업으로 공간지에 참여하게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겨울의 끝자락, 아침 바람은 아직 매서웠다. 기자와 나에 비해서 건축가는 제법 늦을 모양이었다. 건축가를 기다리는 사이 체육관 안을 미리 둘러보고 싶었는데, 수위실 인터폰 너머 행정실은 허락하지 않았다. 행정실의 반응을 뒤늦게 전하는 기자에게 건축가는 옅은 미소를 띄웠다. 발주처와 건축가 사이 벌어졌던 ‘구조적 불화’에 대해서 대충은 알고 있던 터였다. 건물을 둘러보는 중간중간 건축가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아이디알은 설계공모전 당선을 통해 압구정초등학교와 언북중학교, 두 학교의 다목적강당을 설계하게 되었다. 큰 사무소는 이렇게 작고 귀찮은 일에 덤벼들려 하지 않았고, 정보력이 부족한 작은 사무소는 이렇게 재미있을 법한 일이 있는지를 아직 모르고 있었다. 덕분에 갓 시작한 작은 사무소로서는 감사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기쁨과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건축에 대한 열정과 디자인의 가치에 대한 믿음만으로 덤벼든 어린 건축가에게, 선수들끼리 사이 좋게 지내오던 ‘판’은 상냥하지 않았다. 처음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건축가에게 모든 과정이 낯설었다. 건축가의 정성과 소신은 느닷없는 고함 소리에 묻히기 일쑤였다. 발주처는 건물의 주인인 자신들을 두고 ‘감리자도 아닌 설계자’가 왜 벽돌의 미묘한 질감 차이에 집착하는지, 왜 방음벽 패턴에까지 신경 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건축가의 의도를 최대한 반영하려는 현장소장의 마음이 빛났다. ‘감리자도 아닌 설계자’에게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전화를 걸어 디테일을 협의했다. 그래도 공사비 삼백만원을 아끼기 위해 전동커튼 대신 시커먼 필름지로 ‘빛의 상자’를 덕지덕지 발라버리는 사태를 막을 수는 없었다. 밝은 회색빛의 컨트롤 조인트가 벽돌벽을 보란듯이 가로지르는 것도, 번쩍거리는 스텐레스 난간 기둥이 세워지는 것도 막을 수 없었다. 이 모든 ‘사태’에도 불구하고, 언북중학교 다목적강당은 평범한 학교 건물 이상의 세련된 스타일과 높은 완성도를 성취하였다.

 

건축가의 설명에 따르자면, 그들은 “아이들의 창의성을 위해서라며 알록달록한 원색을 쓰거나 아기자기한 장식을 다는 것이 아니라, 두어 개의 단정한 재료로 물성의 섬세함과 단아함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리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단순한 톤의 공간에서 자연스러운 빛과 그 속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건물을 만들고” 싶었다. (비평자의 생각으로는) 원색의 요소나 곡선의 모티브를 붙이는 식으로 ‘디자인을 덧씌우는’ 흔한 수법은, 사실은 아이들을 어른들의 세계로부터 격리하고 싶어하는 학부모들의 욕망과, 예산투입의 성과를 쉽게 드러내고 싶어하는 관료들의 바램, 그리고 편하게 짓고 싶어하는 시공사의 희망이 절충된 결과일 뿐이다. 건축가가 믿는 ‘건축의 가치’와 건축가가 집중하고자 하는 ‘동시대성에 대한 고민’은 ‘아이들이 쓸 건물’이라고 가릴 만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아이들을 존중하는 태도일 것이다. ‘특정한 형태적 어휘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설명하지만, 아이디알의 작업들에서는 분명 일관된 흐름이 느껴진다. 그들은 ‘해야 하는 말’의 틀 안에서 ‘하고 싶은 말’을 뽑아내며, 설명될 필요가 없거나 설명될 수 없는 말은 아예 건드리지 않는다. 가령, 해결해야 할 과제(장스팬의 대공간)에 대한 기술적인 해결(참신한 구조시스템)을 통해 공간의 스펙이 아닌 공간의 가치(생동하는 공간감)를 창출한다. 없어도 되는 무언가를 무의미하게 덧붙이기 보다는, 굵직굵직하게 벽면을 접고 자르고 겹쳐서 스케일의 부담감을 극복한다. 그리고 그렇게 접고 자르고 겹쳐서 생긴 거대한 균열을 내부 공간 연출의 유력한 단서로 삼는다. 길다란 직육면체 윤곽으로 짜인 트러스는 넓은 지붕을 지탱하는 핵심 구조체이자, 어두운 체육관 속으로 빛을 끌어들이는, ‘빛의 상자’이다. ‘빛의 상자’는 무뚝뚝하고 거대한 벽돌 덩어리를 적절히 갈라놓는 동시에 긴밀하게 묶어내는 이중적인 역할을 한다. 톱니처럼 튀어나온 ‘빛의 상자’는, 밖으로는 흔한 박공이나 볼트(vault)와는 사뭇 다른, 기념비적이고 단호한 표정의 스카이라인을 연출한다. 안으로는 균열된 틈을 통해 확장되는 공간감, 그리고 거대한 공간의 윤곽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 같은 미묘한 긴장감과 생동감을 연출한다. 촘촘히 늘어선 루버는 밝게 빛나는 ‘빛의 상자’와 어두운 필로티 사이의 어색함을 세련되게 풀어주고 있다. 야구공을 막는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기능과 함께.

 

얼핏 무뚝뚝해 보이지만 언북중학교 체육관은 넓게 펼쳐진 운동장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 살펴보면 살펴볼 수록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스멀스멀 피어 오른다. 그 것은 ‘학교 이야기’도, ‘체육 이야기’도, ‘아이들 이야기’도 아닌, 그냥 ‘건축 이야기’이다. 탄탄하고 정갈하게 짜여진 담백한 건축 이야기. 그 것이 곧 건축가가 공공을 향해 풀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서비스 아니겠는가.

 

한편으로는, 건축가가 추구하는 ‘건축의 가치’ 속에 기존 맥락에 대한 배려가 자리잡을 여유가 보이지 않는다. 건축가는 기존 학교건물에서 ‘건축적인 가치’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모듈이든, 패턴이든, 어휘든, 재료든, 새 건물을 디자인하면서 옛 건물에서 참고할 만한 것은 없었다고 잘라 말한다. 그게 비평하는 입장에서는 아쉬운 지점이었다. ‘건축적인 가치’는 ‘건물’이 아닌 보는 이의 ‘시선’ 속에 있다고 믿는 입장에서는 말이다. 엄격한 모더니스트로서의 당연한 태도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그런 단호함 덕분에 관료주의와 타성을 돌파해서 이 만큼이나 성취해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건축가의 태도를 존중하는 한편으로, 형편없이 평범한 일상에서 나름의 가치를 찾아내려 하는 따스함까지 갖추게 되었을 때의 작품을 자꾸 기대하고 싶어진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종 업계 종사자로서 오랫동안 지켜보며 배우고 싶고, 함께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다.

 

희망1 : 과정과 교훈을 건축가는 일일이 정리해서 매뉴얼로 만들었다. 그리고 새로 이 ‘판’에 들어오고자 하는 또래 건축가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건축가는, ‘그새 경쟁률이 높아져서 이제는 당선되기 어려울 것 같다.’며 웃는다. 그래도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 또 하면 더 잘 할 자신이 있느냐는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빛나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희망2 : ‘건축의 가치’에 아이들은 반응한다. 어느 날, 언북중학교 학생 하나가 막무가내로 설계사무소에 찾아왔다. ‘공간이 너무 좋아, 시간 날 때마다 체육관 안에 들어가 서성거린다’면서, 건축가를 붙잡고 건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두서없이 이어지던 건물 이야기는 어느새 진로상담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기고]깍지집

보건소(보편적인건축사무소) 신작, ‘깍지집’에 대한 비평이 공간지2018년6월호(SPACE607)에 실렸습니다.

모처럼 좋은 건물을 관찰하고 생각을 정리하게 된, 나아가 저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 좋은 기회였습니다.

지면에는 생략된 내용이 있어서, 편집부에 의해 수정되기 전의 원고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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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소’는 ‘보’편적인 ‘건’축 사무’소’를 줄인 말이다. 줄여서 만든 이름이 건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엉뚱한 단어가 되니, 한 번 들으면 좀처럼 잊기 힘들 정도로 각인이 된다. 왜 이름을 이렇게 붙였는지, ‘보편’의 뜻은 무엇인지. 가벼운 웃음과 함께 반사적으로 질문이 연달아 튀어나오고, 흘러가듯 이어지는 대화에는 가속이 붙는다. ‘보건소’와 ‘건축사무소’. 의미는 완전히 다른데 대략의 맥락은 통한다. 보건소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의료서비스를 적은 부담으로 널리 보급하는 곳이다. 그런 맥락을 염두에 두고, 건축설계서비스가 필요한 이들에게 쉽고 편하게 다가가고 싶다는 바램을 담아 붙인 이름이라 한다. 정말로 ‘보건소 같은 건축사무소’라면 속칭 ‘구청 앞 허가방’을 연상할 수도 있겠는데, 지향하는 바가 정확히 그 지점에서 머물고 말 것이었다면, 역설적으로 이렇게 눈에 띄는 키치 스타일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전상규 소장은 매스스터디즈에서 오랫동안 실무를 닦았기에, 그에게는 매스스터디즈의 유전자가 담겨있을 것이다. 매스스터디즈의 전위적인 스타일과 ‘보편’이라는 얌전한 단어가 겹치는 지점에서, ‘보건소’의 색깔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재기 넘치는 디자인실험을 추구하되, 받아들이기에 그리 불편하지 않고 만들기에 그리 까다롭지는 않은 어느 일정 범주 안에 들어오게끔, 그래서 ‘보편’이라는 굴레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게 하고자 한다는 포지셔닝. 더 나아가, ‘보편성’에서 찾아낸 문제의식을 디자인의 실마리로 삼되, 결과적으로는 보편의 영역을 보다 넓게 만들고 싶다는 야심. ‘보건소’라는 재치 있고 함축적인 이름과 전상규소장의 실무 이력, 그리고 그의 차분하고 소박한 표정과 말투에서 대략 이 정도의 지향점을 짐작해 본다.

지난 몇 년간 보건소는 그런 짐작에 들어맞는 작업들을 보여주었다.

역삼동 일대에 지어진 몇몇 근린생활시설들이 아주 좋은 예다. 강남대로의 엄청난 유동인구를 의식하여 눈에 띄게 도전적인 조형을 자랑하는데, 그러면서도 시각적 표현이나 재료와 구법에서의 실험은 ‘사업성(이익이 남는다.)’과 ‘범용성(다양한 프로그램을 수용할 수 있다.)’이라는 기준을 크게 해치지 않은 작업들이었다. 한두개의 해프닝에 그치지 않고 네다섯번의 연작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보건소의 작업이 건축주로부터 ‘강남번화가의 소규모 상업건물’이라는 맥락에서 충분히 ‘보편적’이라 인정받았음을 알려준다.

일산 근처 택지개발지역에 자리잡은 점포주택 ‘강녕재’는 건물 덩어리의 벽돌 외피가 둥글게 휘어지면서 주차장 필로티 상부로 스윽 스며드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사실 벽이 천정이나 바닥으로 휘어지듯 이어지는 수법은 현대건축에서 오래된 클리셰이고, 아직은 새롭지만 더 이상 참신하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수법이 동네 점포주택의 흔한 필로티 주차장에서 불쑥 등장하는 모습이 나로서는 신선해 보였다. 뻔한 정답을 뒤늦게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은평뉴타운의 ‘깍지집’은 벽돌을 전면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강녕재’로부터 이어지는 또 다른 연작의 흐름 위에 있다. 요즘 몇 년 동안 듀라스택의 콘크리트 블록, 큐블록S시리즈는 일명 ‘와이드벽돌’로 불리면서 큰 인기를 얻었는데, 가로 방향으로 기다란 비례감과 더불어, 같은 질감의 다양한 색깔을 갖추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단순하고 매끄럽게 연출된 덩어리 안에 세 가구가 마치 퍼즐처럼 입체적으로 얽혀 있는데, 세 가구는 각각 다른 색깔의 블록으로 마감되어 있다. 그래서 가구와 가구가 접하는 부분에서는 자연스럽게 다른 색깔의 블록들이 맞물리게 된다. (이렇게 맞물리는 모습에서 ‘깍지’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보통 비례의 벽돌이었다면 다소 신경질적으로 얄팍하게 맞물렸을 텐데, 와이드벽돌 특유의 길쭉한 비례 때문에 다소 느슨하고 여유 있게, 이어지듯 맞물리는 연출이 된다. 콘크리트라는 공통된 질감 안에서 조금씩 변주되는 색깔 차이이기에 조잡한 느낌도 크지 않다.

옥상 발코니에는 와이드벽돌을 얼기설기 쌓아서 투과율이 높은 벽을 만들었다. 긴 벽돌을 사용해서 투과벽을 이중으로 쌓다 보니, 높은 투과율에 비해 의외로 시선은 (신기할 정도로)많이 차단된다. 세대별로 다른 색깔의 벽돌을 사용하기에 세대를 구분하는 투과벽 역시 두세가지 색깔의 벽돌들이 빈 허당을 매개로 입체로 얽히게 되는데, 아주 간단한 발상과 명쾌한 규칙으로 생성된 디자인이지만 그리 단순하지 않은, 제법 풍성한 효과를 빚어낸다. 앞서 언급한 ‘깍지’와 더불어, 그토록 널리 쓰였으면서도 이제껏 활성화되지 않았던 와이드벽돌의 잠재력이 비로소 제대로 드러나는 듯한 장면이다. 앞서 ‘강녕재’에서처럼 뻔한 정답을 뒤늦게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든다.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동료 건축가의 입장에서 반가움과 낭패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한편, 출입문 위에 붙은 날렵한 철판 캐노피 위에 굳이 무거운 벽돌을 얹은 것은, 루이스 칸의 저 유명한 ‘아치가 되고 싶어하는 벽돌 이야기’에 비추어 보면 선뜻 동의하기 힘든 장면이다. 와이드벽돌은 자신이 캔틸레버 철판 위에 위태롭게 올라타게 될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상규 소장은 건물 전체를 벽돌로 감싸려는 의도의 결과라고 설명하는데, 설명을 듣고 찬찬히 살펴보니, 작은 장면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건물 전체의 디자인 일관성과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고, 거리에 접한 건물의 표정을 한결 상냥하게 꾸며주고 있다. 철판위에 놓인 벽돌 마구리는 의외로 눈에 잘 띄는데, 물론 그 집 고유의 색깔을 띤 벽돌이다. 뭔가 간질간질하고 귀여운 제스처인데, 앞으로 본격적으로 펼쳐질 이 거리의 풍경을 좀 더 밝고 훈훈하게 연출하는 데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된다. 사실, 본래의 디자인은 요양원을 등지는 부분의 건물 외벽이 그대로 휘어져 올라가 지붕으로 연결되는 내용이었는데, 시공사의 역량 부족과 그로 인한 불신 때문에 건축주 추가부담으로 지금의 모습 (칼라강판 지붕)이 되었다고 한다. 원안처럼 지붕까지 벽돌로 마감되었더라면, 철판 캐노피 위에 얹혀진 벽돌과 함께 한층 더 일관되고 완성도 높은 디자인이 구현되었을 것이다.

이제껏 거론한 몇몇 장면들을 통해, 보건소가 추구하는 디자인 방법론을 짐작해본다. 큰 획으로 굵직하게 설정한 단순한 디자인 개념을 경쾌하게 밀어붙이는 즐거움. 작은 부분까지 일관되고 끈질기게 연출하려는 노력. 재료의 고유한 특징과 잠재력을 끈질기게 찾아내는 동시에 고정관념과 편견에 얽매이지 않는, 집요하지만 경직되지는 않은 태도.

물론 아쉬움도 있다. 건물을 이루는 일부 요소들은 건물 본체에 긴밀하게 결합되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추가된 해프닝처럼 보인다. 그리고 길에 면해 드러나는 건물의 얼굴은 실내에서 요구되는 창문의 크기와 배치가 다듬어지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서 자동적으로 생성되다시피 빚어진 디자인이라, 지금의 이 모습으로는 갈고 닦여 빚어진 ‘예쁜 얼굴’이라 보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인상의 원인은, 앞서 짐작한 획 굵고 대범하게, 그리고 경쾌하게 진행되는 보건소의 디자인 태도에 닿아 있고, 그래서 이런 식의 몇 가지 장면을 통해서 디자인의 완성도를 논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임의로 설정한 디자인 주제를 일관되게 끌고가는 데에 집착하는 한편으로, 특정 시점이나 장면에서의 고정된 ‘아름다움’을 정교하게 다듬는 데에는 그만큼의 관심은 없기 때문이다. 이 것은 매스스터디즈, 더 나아가 오엠에이의 작업에서 가끔 엉뚱한 허점 같은 것을 발견하고 당황스러워지는 것과 같은 맥락의 일이라 생각한다. 쉽고 명쾌한 개념을 직설적으로, 경쾌하게 전개하는 그 만큼, 기왕이면 세부적으로 예쁘게 다듬어지기도 하면 더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램인데, 이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습관이나 가치관의 차이일 수도 있는 문제이기에, 결코 강요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보편적인 건축 사무소는 동료 건축가가 쉽게 활용할 수 있고 건물을 둘러싼 모든 이들이 즐겁게 누릴 수 있는 보편성의 윤곽을 꾸준히 야금야금 넓혀가고 있다. 나를 비롯한 동료 건축가들은 보편적인 건축 사무소의 소박한 작업들을 양분삼아, 또 다른, 더 넓은 보편을 만들어낼 것이다.

디자인 열심히 하는 소규모 건축사무소가 생존에 그치지 않고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방법들 중 하나가 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