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얼굴이나 음성, 말투, 습관 못지 않게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유효한 수단은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다. 가지고 다니는 평범한 물건들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추구하는지 등을 (알게 모르게) 다른이에게 전하게 된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대략 2년 전쯤부터 가방을 어깨에 두르고 다니기 시작했다.
지갑, 디지털카메라, 안경집, 충농증약, 그리고 간단한 어학교재 또는 책을 넣고 다니기 위해서이다.

가벼운 면, 또는 캔버스 가방들인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이 서른 중반을 막 넘기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이렇게 가볍고 허술한 가방을 메고 다닌다는 사실이 적잖게 흥미롭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한때는 직장동료들 사이에서 소박한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었고, 가끔씩 친구들이나 가까운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날때에는 그들로 하여금 “내가 여전히 나임을” 확인케 하는,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에는 첫만남의 어색함을 누그려뜨리기 위한 무난한 화제거리가 되어주기도 하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소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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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부엌X키친”이라는 전시가 열렸었는데, 입장권을 사면 덩달아 받게 되어 있었던 면가방이다. (이 가방 전에도 몇 개의 면가방을 샀었는데, 어디로 처박혀버렸는지 모르겠다.) 전시에는 사실 별 관심이 없었는데, 가방을 얻기 위해 만원이 넘는 (전시의 규모에 비해서 제법 비싼) 입장료를 선뜻 냈던 기억이 난다.

고만고만한 아이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고, 어설픈 듯 편안하게 써 있는 타이틀 글씨가 마음에 든다. 여성성을 어떻게 정의하는 게 좋을 지, 그리고 여성성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방면의 관습적인 여성성에 대해서 조금 동경하는 마음이 있는 것도 같다. 아무튼 메고 있으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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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동경에 놀러갔을 때, 롯폰기힐즈에서 산 캔버스 가방이다.
오른쪽 아래에 조그마한 동그라미 여섯개가 보이는데, 저게 롯폰기 힐즈의 로고이다.
파랗고 하얀, 작은 버튼뱃지는 뉴요커님의 초청으로 플리커 파티 갔었을 때 구해온 것이고.

점심을 먹기위해 푸드코트에 갔었는데, 간단한 샌드위치와 음료들이 진열되어 있는 가운데 이 캔버스 가방들이 가지런하게 접혀서 함께 놓여있는 게 이채로와 보였다.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롯폰기힐즈 방문을 기념할 수 있는 실용적 아이템을 구입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 얼른 사버렸다.

메고 있으면 롯폰기힐즈 특유의 부티나고 물 좋고 세련된 분위기가 내 몸을 휩싸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참 좋아지고 뿌듯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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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경복궁 옆 현대갤러리 근처 “밀리미터밀리그램”에서 구입한 면가방이다.
이것 말고도 몇 가지 다른 디자인의 가방들이 있었는데, 제일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디자인이 이것이었다.

가면 갈수록 경직되고 타성에 젖은 디자인을 하게 되는 것 같아서, 의식적으로 이런 식의 좀 깨는 듯한 디자인을 고르는 편이다. 한계를 돌파하고 가능성을 넓히고 싶은 마음이겠다.

요즘은 이 세 개 가방을 번갈아 메고 다닌다.

왜 이런 가방을 메고 다니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

나는 가방이, 가방에 담기는 물건들보다 더 무거운 상황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런 상황이 본말이 전도된 부조리처럼 느껴져서 참을 수 없이 화가나는 것이다.

물론 가방이 단지 어떤 물건을 담고 운반하기만을 위한 소품은 아니다. 그냥 멋을 위해서 빈 가방이나 다름없는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허영으로 가득찬 사람이라고 매도하고 싶지도 않다. 허영기가 있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그 표현의 방식이 약간 다른 것 같다.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고.

담기는 물건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다소 무거워지더라도 튼튼해야 하는 가방들도 있는데, 지금의 나는 무슨 대단한 기밀서류를 들고 다닐 일도 없으니까 상관 없다.

앞서 가방이 가방에 담기는 물건들보다 더 무거운 상황이 부조리처럼 느껴진다고 했는데,
이런 기분은 글이나 말, 혹은 디자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글이, 글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보다 더 기름지고 무겁고 어려운 장면을 접하게 되면 울컥 화가 나기도 하고.

디자인이, 디자인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혹은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무엇보다 쓸데 없이 넘쳐보일 때에는,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게된다.

이런 면가방이나 캔버스가방의 장점들이 참 많다.

가격도 싸고.

예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저런 이야기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 참 좋은 것 같다.

(가방을 주제로 쓰여진) 이 글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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