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옥재/01

청와대 보안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었던 경복궁의 북쪽 영역이 개방되었는데요.
얼마 전 구경갔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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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the North Gate
경복궁의 북문개방
景福宮北門開放

9월 29일 부터 신무문(경복궁 북문)으로도 입장이 가능합니다.

경복궁관리소

점잖은 색깔과 아래에 희미하게 깔린 북문의 이미지가 크게 눈에 거슬리는 것은 아니지만, 텍스트 배열과 타이틀 위계 설정을 비롯한 편집디자인이 자세히 보면 볼 수록 아쉽게 느껴집니다.

“경복궁의 북문을 개방한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타이틀이 국어/중국어/영어 삼개국어로 씌어져 있는데, 상식적으로 국어가 가장 높은 위계를 차지해야 할 것이고, 중국어와 영어는 그보다 아래의 위계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중국어나 영어나 사용하는 사람의 숫자에 상관 없이 우리에게는 모두 외국어이니까, 둘 사이에 위계를 두는 것은 좀 우습겠지요.

요약하자면, 국어>중국어=영어 정도의 위계를 염두에 두고 글자 배열을 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국어 타이틀이 가장 크게 씌어져있긴 한데, 영어와 중국어 타이틀의 배열은 좀 뒤죽박죽되어있습니다. 영어는 가로 방향으로 써 있는데, 제일 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크기에 상관 없이 전체 화면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에 비해 중국어는 한글 타이틀 바로 옆에 같은 세로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어서 한글타이틀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구요. 글자 크기도 영어보다 한결 커서 마치 영어보다 중국어가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인상을 주는데, 자칫 잘못하면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될 수도 있겠습니다. (농담)

아.. 저게 중국어가 아니라, 한글의 뜻을 설명하기 위해 꼬리로 붙은 한국식”한자”로군요.
엄밀히 말해 중국어도 일어도 아니지만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도 뜻을 파악할 수 있으니, 저것으로 중국어와 일어의 구실도 하고 있는 것이겠습니다.

의미가 왜곡되는 등의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소 궁색하고 투박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드네요.

저는 한글전용에 찬성하는 입장이라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한글 뒤에 한문을 나란히 쓰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인 유적이니 “경복궁” 정도를 한글 뒤에 작은 한문으로 쓰는 것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북문” 이나 “개방” 같은 일반적인 용어까지 굳이 한글에 꼬리로 붙는 한문으로 넣어야 할 지는 의문입니다.

아무튼 저라면, “경복궁의 북문개방”은 좀 더 크게 쓰고, 한국식 한자는 빼버리고, 중국어와 영어는 같은 크기와 같은 방향으로 조금 작게, 나란히 배열하겠습니다. 영어는 세로쓰기가 어색하니 영어 중국어 모두 가로쓰기가 되겠지요. 기왕에 외국어로 안내하는 것이니 일본어도 넣을까요?

그리고 “경복궁관리소” 라는 뻔한 텍스트는 아예 빼버리겠습니다. 안그래도 화면 좁은데, 저런 걸로 눈을 어지럽힐 이유가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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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런 식이 되겠군요.
이것도 그렇게 보기 좋고 세련되어 보이진 않지만, 적어도 텍스트들끼리 서로 애매하게 자리다툼을 벌이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스스로 평균 이상의 점수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

….

심심해서 쓸데 없이 유난을 떨어보았습니다. 민망하군요. 변태도 아니고… 거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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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금속판으로 제작된 안내판.

고건축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색깔은 고풍스럽고 재질과 모양은 모던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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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하면확대)

이것이 이번에 신무문과 함께 개방된 “집옥재”라는 건물입니다.
세 개의 건물이 나란히 붙어 잇는데, 각 건물의 스타일이나 배치 방식이 낯설고 기괴한 느낌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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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공공디자인의 전형입니다.
맨 위에 붙어 있는 노랑 네모는 왜 저기에 저런 형태와 색깔로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허전하니까 지르고 보는 식의 고민 없는 디자인입니다.
빛바래고 칙칙한 하늘색과 곤색도 저 색깔이어야 할 이유가 잘 읽혀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감각적으로 예쁜 것도 아니구요.
뒤로 꺾여진 형상과 아래 받침대를 가로지르고 있는 두 개의 세로 줄무늬도 참으로 “거시기”해보입니다. (아씨… 단어 고르기도 귀찮아…. >.<)

우스꽝스러운 디자인에 상관없이 텍스트는 적잖게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무너지고 있는 나라의 왕으로써, 외국사신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그럴싸하게 보이고 조금이라도 덜 만만해 보이고 싶어서 나름대로 요란하게 지은 집입니다. 저렇게 지어 놓고 저 집에서 이나라 저나라 사람들을 정신 없이 만나면서 때로는 양다리 세다리 걸치고 때로는 여기저기 줄타고 발빼고 하는 식의 필사적인 외교전을 벌였다는 이야기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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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에 의하면,
연못 한가운데 쯤 서 있어야 할 것 같은 어색한 이층짜리 팔각정자가 “팔우정”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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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축에 무지한 제가 보기에도 한 눈에 딱 중국풍으로 보이는 저 건물이 “집옥재”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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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무난하고 품위있어 보이는 저 건물이 “협길당” 인가 봅니다.

세 채의 건물을 그냥 “집옥재”라고 편하게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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