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월간에세이2008년8월호/새라쟈(Saint Lazare)기차역

월간에세이 8월호 / “이 한장의 사진” 코너…
월요일 마감인데 방금 겨우 다 썼다. 어우 등 가려워…



필자는 건축설계사무소 직원이다.

건축이나 도시 디자인에 관련된 일을 하는 다른 분들이 보통 그러하듯이, 필자 역시 사진을 많이 찍는 편이다. 가끔 멋진 건물을 구경하러 해외로 답사여행을 가는데, 여행 중 마음에 드는 건물이라도 만나면 그 하나의 건물에 대해서만 이삼백 장의 사진을 찍기도 한다. 멋진 장소, 멋진 건물과의 만남이 거듭되는 날에는, 하루에 오백여 장이 넘는 사진을 찍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좋은 건물, 좋은 장소에는 몰입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정신 없이 사진을 찍다 보면 수 십장의 사진은 금방 찍게 되고, 목과 다리가 조금 뻐근한 듯 느껴지는데, 사진을 다 찍고 집에 돌아오면 그 것이 그냥 조금 뻐근한 정도의 통증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건축설계를 전공하고 실무를 시작한 것이 꽤 오래되었는데 비해, 의외로 이렇게 사진을 많이 찍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2004년이니 4년 전의 일이다. 프랑스 건축유학생 모임과 주한프랑스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서 약 반 년간 파리에 머물면서 현지 건축설계 사무소에서 실무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이 것이 필자에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은 해외여행이었으며, 또한, 사진을 본격적으로 많이 찍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주말, 루브르 미술관에 가는 길에, 출퇴근하면서 지하철을 갈아타곤 하는 새라쟈 라는 역의 지상 기차역 풍경이 궁금해졌다. 매일매일 지하철을 갈아타면서도, 지상 기차역의 풍경을 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라, 시간여유도 조금 있고 해서 잠깐 구경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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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보니 예상치 못했던 압도적인 풍경이 두 눈 가득히 밀려 들어왔다. 새라쟈는 서울로 이야기하자면 신촌역과 흡사한 위상의 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외곽의 위성도시와 도심을 이어주는 교통 부도심의 역할을 하는 역인데, 배낭여행객들 사이에서 유명한 북역 이나 리옹역 같은 고속열차가 다니는 유명한 역은 아니었지만, 엄청난 크기에서 비롯되는 공간의 박력은 그런 유명한 역들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수 차례에 걸쳐 그다지 치밀하지 않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증,개축 때문에 다양한 크기와 형식의 트러스 지붕이 겹쳐지고 충돌하면서 불규칙적인 모양을 빚어내며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역의 위상을 보여주는 듯 했지만, 동시에 다른 역에서는 보기 힘든 거친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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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미술관에 처박혀 하루 온종일 시간을 보내기 전, 아주 잠깐 구경을 하고 지나가겠다는 원래의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각각 백여 미터가 넘는 길이의, 열댓 개의 플랫폼들 위를 이리저리 헤집고 뛰어다니며 정신 없이 사진을 찍었다. 멀리, 넓게 바라보니 거대한 공간 아래, 온갖 구조체와 먼지로 얼룩진 천창과 낡은 나무판들이 거칠게 충돌하며 꿈틀대는 광경이 압권이었다. 가깝고 좁게 집중하니 또 다른 공간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탁한 천창에 걸러져 뽀얗게 흩어지는 빛을 바탕으로 때로는 가지런하게, 때로는 엉성하게 늘어선 구조체들은 꼼꼼하지만 조금은 신경질적인 미술가가 예리하게 그어댄 시커먼 펜 선 같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골이 진 투명플라스틱 천창 위에 먼지와 녹물이 덕지덕지 얹혀져 정교한 패턴을 빚어내는 광경 앞에서 넋을 잃고 숨죽이며, 때로는 깊은 한숨을 쉬며 연신 사진을 찍어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풍경들은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넘어서, 개인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좋은 건물, 좋은 장소에 관한 가치와 통하는 측면이 있는 듯 하여 더더욱 필자를 매료시켰던 것 같다. 현실적인 요구에 대한 대응, 그 이상을 넘어서지 않는 소박함. 필요 이상의 꾸밈과 가식이 없는 벌거벗은 건강함. 햇볕, 빗물, 바람, 먼지 등에 의하여 예기치 않게 드러나는 세월과의 교감의 흔적. 그 속에 깃들여져 있을 것만 같은, 그 장소, 그 공간의 영혼.

 

머리 위에 펼쳐지는 온갖 구조체와 빛의 향연에 취해 고개를 등 뒤로 힘껏 꺾으며 연신 사진을 찍느라 목과 허리가 뻐근해졌고, 짧지 않은 거리를 뛰어다니느라 다리도 아파왔지만, 그런 사소한 피곤은 예상치 못하게 주어진 엄청난 선물에 대한 필자 나름의 답례 내지는 대가라고 생각하였다. 그 와중에 입맛을 다시며 성추행을 하려 필자에게 다가왔다가 달아났던 어느 터키 할아버지의 느끼한 눈빛은 이제는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결국 한 시간 넘게 머물면서 160여장의 사진을 찍느라 진이 빠져버렸고, 그 뒤에 이어진 루브르 미술관의 방문은 김 샌 맥주처럼 다소 싱거운 감흥을 안겨주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이 한 장의 사진에 얽힌 가슴 뛰는 추억은 건물에 대한, 그리고 장소에 대한 필자 나름의 몰입의 시작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순수한 열정과 에너지를 어떻게 키워나갈 것인지가 지금부터 시작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고민거리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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