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디자인플라자/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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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www.ddp.or.kr)를 살펴보니, 이 계단의 이름이 ‘조형계단’ 이었네요. 여러 의견들이 있는데, 저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내부 공간들에 이름 붙인 방식이 썩 마음에 듭니다. 알림터, 살림터, 둘레길, 조형계단 등, 아시다시피 우리말로 붙였는데, 우주선 같은 겉모습이나 극도로 추상화된 공간과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묘한 긴장감도 좋고요. 그만큼 디디피가 시민들에게 친숙하게 느껴지기를, 쉽게 다가와서 마음껏 사용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지는 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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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도 한참 사진을 찍었네요. 현란한 조형이 압권이었는데요. 마치 미로와도 같은 거대한 내부 공간, 이음새 없이 매끄럽게 흘러가는 정처 없는 흐름 속에서, 나름의 랜드마크 역할을 유감 없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하자가 눈에 띄더군요. 도전에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인지라, 이 정도를 놓고 정색을 하고 싶진 않습니다.

앞서 ‘랜드마크’라고 말했습니다만, 조형계단은 일종의 허브 역할을 합니다. 이곳으로부터 다양한 전시실들과 이벤트홀 등으로의 동선이 나뉘어지기도 하고, 또 (조금 있다가 다루어질) ‘둘레길’ 같은, 느슨하게 늘어진 동선을 단숨에 가로지르는 지름길의 역할도 합니다.

그래서 계단이 시작되는 언저리에는 이런저런 창문과 문이 모여있는데, 그 것들이 배열된 상황이 정교하게 다듬어진 미장센은 아닌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정 시점으로부터 파악되는 장면을 의식하고 거기에 맞춰 정갈하게 다듬은 디자인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실 디디피는 이런 식의 감상의 틀을 뛰어 넘는 디자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둘레길’로 들어섰습니다. 전시실을 휘감으며 흘러가는, 완만하고 넉넉하게 펼쳐진 비탈길입니다. 앞선 포스팅에서 ‘끈’ 또는 ‘틈’이라고 표현했던 요소가 이 곳에서는 천정에서 조명기구 따위를 수납하는 검은 음각의 공간으로 변주되어 등장합니다. 확실히 공간의 흐름을 안내하는 효과가 있어 보입니다. 바닥이고 벽이고 천정이고 모두 하얗게 붕 떠버리는 상황이니, 천정의 검은 띠 마저 없었다면 공간의 윤곽이 잘 읽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른쪽에 전시실로 통하는 창문이 보이는데, 천정 끝까지 솟아있지 않고 중간 높이 정도에서 멈추어 있습니다. 사람의 스케일에 반응한다는 의미도 있고, 공간의 윤곽을 지킨다는 의미도 있겠습니다. 앞선 포스팅에서 보았던 내용이지요.

자세히 보면 그냥 무심히 뚫려있는 게 아니라, 조금 복잡한 상황입니다. 활용할 수 있는 벽의 두께 안에서 몇 번인가 살짝 접기도 했고, 비스듬히 깎아놓기도 했네요. 창문 너머로 전시실 풍경이 보이는데, 분위기를 보니 간송 컬렉션 전시인가 봅니다.

워낙 낯설고 개성이 강한 공간이다 보니, 아무래도 이런 상황이 좀 당황스럽습니다. 컬렉션하고도 잘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고, 또, 전시실 내부의 상황이 이렇게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좀 어수선하다는 느낌도 들고요.

전시실로의 입구나 창문이 없는 대부분의 ‘둘레길’은 이런 모습입니다. 무서울 정도로 삭막해 보입니다. 넉넉하게 넓게 펼쳐져 있는지라 지나다니는 통로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활동을 담아낼 것이라고 하는데, 기울어진 바닥과 벽을 두고 어떤 활동, 어떤 상황이 얼마나 유연하게 일어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입니다.

깔끔하게 마감된 공간에서 쓸데 없이 거슬리는 것이 이 구멍들입니다. 구멍이 뚫린 영역을 얇게 펴서 이어진 선처럼 연출하는 것은 어려웠을까요. 아니면 안 뚫어도 되는 부분도 일일이 구멍을 뚫어서, 구멍 뚫린 영역을 이어지는 선처럼 표현할 수는 없었을까요?

지루하게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문득 틈이 나오는데,

엘리베이터와 계단으로 통하는 공간입니다. 환상의 공간 속에서 일상의 공간이 불쑥 고개를 내밀어서 흥을 깨뜨리는 듯한 상황입니다. 아주 간단한 철문과 엘리베이터 출입구인데, 이 정도의 요소들이 이렇게나 생경하게 보이는 이유는, 흘러가는 둘레길이 그만큼이나 환상적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석에 놓여진 화분이 어색해 보이는 딱 그만큼 말이죠.

벽과 천정을 타고 잘라내듯 그어진 틈이 보이는데, 불이 날 때 방화셔터가 내려오게 될 궤적이겠습니다. 비상출입구와 화분처럼, 환상 속에서 현실을 깨닫게 하는 요소이겠습니다. 특히 방화셔터 레일의 경우, 바닥이나 벽이 얼마나 기울어져 있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는 의외의 기능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워낙 매끄럽게 흘러가는 공간이었기에, 방화셔터가 내려오는 틈이 의외로 눈에 잘 띕니다. 한편으로는 오른편에 보이는 안내표식이 인상적인데요. 공간의 성격에 걸맞게 디자인되었네요.

가다 보니 한쪽 벽면을 활용해서 소박하게 마련된 전시 공간이 나옵니다. 둘레길에서 이런 이벤트가 연출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벽과 바닥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공간에 전시물을 직접 진열하기는 조금 곤란하고, 그렇다면 벽 위에 또 다른 레이어의 벽을 만들어서, 어떤 ‘공간’을 만드는 방법이 유력하겠습니다. 동대문 운동장 주변 동네의 흘러간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는데,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가 이 정도의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모습이 아쉽기도 했습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전시를 위해 만들어진 시설을 찍은 것입니다. 정작 원래의 벽에는 걸레받이가 없는데, 전시를 위해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시설물에는 걸레받이가 붙어 있은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기존 설치물과 임시 설치물 사이의 위계가 역전된 듯한 모습입니다.

둘레길의 끝에서 처음 보았던 조형계단을 만납니다. 조형계단이 둘레길의 지름길이었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겉에서는 고만고만하게 매끄럽게만 보였는데, 견고하게만 보였던 표면 중 어떤 부분은 빛과 시선이 드나들 수 있는 얇은 껍데기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밤에는 어떤 식으로 빛의 얼룩이 지게 될 지 상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깥으로 통하는 문. 문의 안쪽과 건너편 문의 바깥쪽이 겹쳐 보입니다. 비슷한 구겨짐의 반복.

몸의 스케일 감각과 공명하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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