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풍경]잠수교전면보행화

서울시 주관, ‘잠수교 전면 보행화 기획 디자인 공모’에 참여, 제안한 내용입니다. 뉴욕에서 지내는 이동신 건축가와 협업했는데, 결과는 탈락, 아쉽습니다.

1차 심사 결과는 여기!

이동신 건축가와는 처음으로 하는 협업으로, 게다가 원격이라 걱정이 있었는데, (저로서는) 기대 이상으로 즐거운 작업이었고, 호흡도 잘 맞았습니다. 바쁜 일정 중 어렵게 시간 내어 열심히 작업해주었는데, 기대한 성과 이루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소중한 인연 계속 이어나가, 꾸준히 함께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뭔가 짚히는 나름의 탈락 이유가 있어 자책이 되고, 미련도 남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는, ‘털어버리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반걸음 씩이라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차일(遮日/THE CHA-IL) : 서울잠수라운지 SEOUL_JAMSU_LOUNGE

도시 거실 (都市 居室/urban living room)

서울의 한가운데에 위치, 한강을 통해 멀리까지 존재감을 드러내는 ‘매우 서울스러운’ 랜드마크.

그리고, 한강남북 보행 흐름을 매끄럽게 이어주는 유일한 연결체계.

잠수교의 특징을 염두에 두었을 때, 전면보행화된 잠수교를 단지 여유로운 통행로로 간주하는 것은 아무래도 아쉬운 일이다. 게다가 (차량흐름에 방해 받지 않는) 넓은 바닥과 함께 천정(반포대교 하부면)이 있다는 점에서, 잠수교는 약간의 보완으로 꽤 ‘구체적인’ 건축공간이 될 만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잠수교가 통상적인 ‘광장’ 개념을 뛰어넘는 ‘도시 스케일의 공적 거실’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매개 (媒介/intermediation)

한강에 서 있는 수 많은 교각들은 기술적으로 아름답고, 존재 그 자체만으로 강렬한 풍경을 연출, 비일상적인 통쾌함을 제공하기도 한다. 아무런 ‘디자인’이 되어있지 않은 지금 잠수교의 풍경 또한 그 자체로 힘이 있고, 나름의 아름다움과 의미가 있다.

하지만 잠수교가 본격적인 ‘도시 거실’로 작동하길 기대한다면, 지금 상황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 토목 스케일과 사람 스케일 사이를 중재하고 매개하여, 적당한 공간감을 연출하는 무언가를 끼워 넣어야 한다.

토목구조물을 건축공간으로 전환하는데 필요한 매개체.

상황/이벤트/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지원하는 매개체.

가변 (可變/flexibility)

잠수교는 주기적으로 강물에 잠긴다. 바닥 위에 무언가를 세워서 고정된 영역을 만드는 식의 통상적인 건축방식은, 잠수교에서는 비판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상황에 따라 모습이 변하는, ‘가변(可變)’이 답이다. 잠수교 입장에서는 천정이 되는 반포대교 하단면을 활용, 무언가를 매달아 내려뜨려놓는다. 강물이 불어나면 차곡차곡 접어 위로 올린다. 관리 부담을 줄이면서 필요할 때 마다 안정적으로 ‘도시 거실’을 연출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상황에 유연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다. ‘도시 거실’에서 벌어지는 상황/이벤트/프로그램은 성격도 규모도 다양할텐데, 그 때 마다 가변시설을 적당히 펼치고 접어, 맞춤으로 대응한다.

차일(遮日)

차일(遮日)은 상황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 가볍게 덧붙이고 떼어내는 대표적인 ‘가변(可變)’건축요소다. 오랫동안 사용된 건축요소로, 궁중행사 등을 기록한 전통회화에도 자주 등장한다. 커다랗고 네모난 패브릭인데, 보통 한쪽은 처마 끝에 연결하고 다른 한쪽은 밧줄과 대나무 등의 가벼운 구조체로 지탱한다. 처마 그늘을 늘리고 바람을 적절히 가린다. 돌잔치나 결혼식 등 이벤트를 공간적으로 지원한다.

높이 솟은 차일은 멀리서도 잘 보이는데, 평소에는 없었던 차일이 서있다는 것으로 이벤트가 열리고 있음을 알리는 표현이 된다. 바람에 펄럭거리는 차일자락은 비일상적인 설렘을 더해준다.

겹쳐쓰기(重捷/superposition)

잠수교는 여러 번 큰 변화를 겪었고, 곳곳에 변화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의도적이었든 의도적이 아니었든) 변화들이 이전 상태를 완전히 지우는 방식이 아닌, 이전의 상황을 보존하면서 부분적으로 겹쳐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겹쳐쓰기’는 이번 프로젝트를 관통하는 태도와 방식이기도 하다. 새롭게 겹쳐쓰는 와중에 원래 있던 것들을 감추지 않음으로써, 변화의 내력(history)을 자연스레 드러내는 것이다.

과거를 짐작하고 변화를 음미하게 되길 원한다.

감각 이상의 의미를 즐기게 되길 원한다.

잠수교에서 뻗어 나온 ‘조약돌섬’은 흐르는 강물에 보다가깝게 다가서게 하는 한편, 새로운 시점에서 잠수교를 재발견하게 한다.

느슨히 드리워진 차일은 교각 사이로 보이는 풍경을 부드럽게 에워싸는 액자가 된다. 일상 속 평범한 삶의 배경이 특별한 풍경으로 바뀌는 순간.

차일들이 어떤 그럴듯한 모양을 연출할 수 있고, 때로는 느릿느릿 꿈틀거리듯 연속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다. 이 때 차일들은 움직이는 조각작품(kinetic sculpture)이, 한강과 잠수교는 거대한 갤러리가 된다.

발표회, 강연회, 연주회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 집중하는 형식의 이벤트가 열릴 경우, 동서 양측 차일을 최대한 아래로 길게 늘어뜨려 아늑하게 둘러싸인 공간을 연출한다.

유람선 통과를 위해 조성된 ‘언덕’ 꼭대기에는 ‘미디어 클라우드’가 설치된다. 잠수교의 이벤트를 지원하는 한편, 동서 한강 방면으로 메시지를 표출한다.

겹쳐쓰기(重捷/superposition) 실행 전략

변화 그 자체를 잠수교 고유의 정체성으로 삼는다.

거대한 교각 사이에 가벼운 ‘차일’을 겹쳐쓴다. 대조되는 교각과 차일이 서로를 돋보이게 하는 한편으로, 원래 있었던 것은 무엇이고 새롭게 덧씌워진 것은 무엇인지, 변화의 내력(history)이 자연스레 드러나길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잠수교 바닥의 온갖 교통 표식들을 지우거나 완전히 새로운 패턴으로 완전히 가리지 않고, 최소한의 새로운 패턴으로 조심스럽게 겹쳐쓴다. 도로 표면에 얇은 틈을 내고 ‘붉은 구리 플랫바’로 ‘X패턴’을 새겨 넣는다. 예전의 교통체계가 무력화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무심한 발걸음이 과거의 통제와 금기를 가로지르는 통쾌함으로 이어지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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