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한강시민공원/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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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하고, 시원하고, 한편으로는 조잡해 보이는 풍경들이 두 눈 가득 들어왔습니다.

한강 유람선이 인기 있는 관광 아이템이었던 시절도, 잠깐이었는지 몰라도 분명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곧잘 놀러 왔던 기억이 납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묘한 풍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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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라인 스케이트를 표현하는 귀여운 기호도 있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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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처 없이 걷고 있는데, 문득 커다란 철판이 눈에 띄었습니다.

한강양안분류하수관로맨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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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에 만들어진 맨홀의 뚜껑인가 봅니다. 오른쪽 아래 구석에 나온 구두를 보면 얼마나 큰 맨홀 뚜껑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글자 하나하나의 크기가 어른 손바닥만하고, 전체 맨홀 뚜껑의 크기는 웬만한 엘리베이터의 승강기 내부 넓이만큼 컸습니다.

글자 부근에 울퉁불퉁 곰보처럼 붙어있는 찌꺼기들이, 오랜 세월이 지났음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인위적으로는 빚어내기 힘든, “원본”의 힘이 느껴지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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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글씨를 연상케 하는 경직된 글자체와, 둥근 원을 여덟 개의 뾰족한 뿔이 감싸고 있는 예전 서울시 마크가, 80년대 시대상의 단편을 말해주는 듯 하여 흥미로워 보였습니다.

 

한글의 구성원리와는 전혀 상관 없이 정사각형의 틀에 억지로 맞추어진 저런 글자체는, 누구라도 손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반듯한 규격에 쉽게 맞추어 쓸 수 있도록 고안된 스타일로, 컴퓨터 없이는 글도 잘 쓰지 않는 지금은 더 이상 사용될 필요가 없는 촌스러운 글자체입니다.

 

옛 서울시 마크를 살펴보면, 뾰족한 뿔들은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북한산, 북악산, 관악산 등등, 여덟 개의 산을 상징하는 것이고, 가운데 동그라미는 서울시내의 영역을 상징하는 것으로 기억됩니다. 국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친숙하게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는 요즈음 지자체들의 분위기에 비추어 보면 다소 경직되고 권위적인 디자인이라, 역시 지금의 감성에서 보자면 많이 생소한 모습입니다.

 

1984년이라면 한강고수부지, 한강시민공원이 처음 탄생하게 된 한강종합개발이 막 완료되었을 즈음일 것입니다. 한강에도 유람선이 떠다니게 되었다고 흥분하던 기억이 나고, 한강이 다시 태어났으니 우리 민족, 우리 나라도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라며 난리를 떨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미국 L.A. 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때이기도 한데, 올림픽 폐막식 때 상모가 반쯤 벗겨진 호돌이가 뛰어나와서 어색하게 춤을 추던 기억도 납니다.  

 

온갖 추억들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면서, 한편으로는 우리도 웬만큼 잘 살게 된 것 아니냐며 흥청거리기도 했고, 그러는 한편으로는 모두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말로 꺼낼 수 없었던 금기들로 인해 갑갑하기도 했던, 당시 사회의 어색한 분위기가 어렴풋하게 떠오릅니다.

 

지금의 감성에서는 다소 생소하지만, 보면 볼수록 묘하게 눈에 익고 친숙한 기호들에 대한 감상과, 왼쪽 상부의 1984이라는 글자로 인해 떠오르는 온갖 상념들이 범벅이 되어, 한참 동안을 맨홀 뚜껑을 밟고 서 있었습니다. 잊혀진 고대 유적을 우연하게 발견한 고고학자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큼지막하게 제작 연도를 새겨 넣은 모습에서, 하찮은 맨홀 뚜껑으로부터 기념비의 가능성을 예견한 제작자의 깊은 통찰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설프게 장식을 덧붙일 생각을 하지 않고, 단지 우직하게 필요하고 소중한 정보만을 표기해낸, 그 누군가를 진정한 디자이너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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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비슷한 맨홀 뚜껑도 있었습니다. 역시 보통 맨홀뚜껑보다는 훨씬 더 두툼하고 큼지막한 철판이었습니다. ! 사진을 보니, 위에 맨홀 뚜껑이 하나가 더 있었는데, 자전거 도로를 내면서 아스팔트로 덮어버린 것 같습니다. 자세히 보면 아스팔트에 맨홀 뚜껑의 경계가 보이고, 채 가려지지 않은 뚜껑의 일부도 보입니다. 완전히 가려지지 않은 것이 정말 천만다행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복잡하게 살고 있는 커다란 도시 속에서, 옛 추억이 담긴 큼지막하고 두툼한 물건을 불현듯 만나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특정 추억을 담아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기념비 따위에서 느껴지는 감흥보다, 이렇게 크게 특별할 것도 없는 아이템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이 훨씬 깊고 큰 것 같습니다.

 

제발 이 맨홀 뚜껑들을 없애 버리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정기적으로 행해질 페인트칠도 너무 깔끔하지 않게, 그냥 적당히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최신 서울시 마크가 예쁘게 새겨진 깔끔한 철판으로 바꾸면서 이 맨홀 뚜껑들은 무슨 기념관 구석으로 옮겨버리는 바보 같은 일도 제발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맨홀 뚜껑들은 한강 시민공원 특유의 황량하고 썰렁한 분위기 아래에서 제대로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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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홀 뚜껑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올리니, 한참 마무리 공사중인 아파트들이 보였습니다.

변함 없이 삭막하고 획일적인 모습이지만, 1984년 즈음에 지어졌던 아파트들과는 여러모로 다른 놈들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앞으로 저 곳에서 어떤 삶이 펼쳐지고 어떤 풍경이 드러나게 될 지 가늠이 잘 되지 않습니다.

 

오래된 물건들에 대한 감상적인 동경과는 별개로, 나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신기루처럼 세워지는 아파트들의 모습을 무작정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저런 건물, 저런 풍경이 만들어 질 수 밖에 없는 수 많은 조건들의 절묘한 조합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에 다름 아닌데, 나는 아직은 현실로부터 도망가고 싶진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수 많은 신기루가 사라지고 나타나는 어지러운 와중에도, 내 존재의 근거, 내 지난 삶의 근거를 몸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묵직한 무언가는 변함 없이 자리를 지켜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일 지라도 말이지요.

 

앞으로 수 년, 수 십 년 뒤에, 이 맨홀 뚜껑들에서, 소호 거리 바닥에서 보았던, 백 년도 넘게 오래된 철판들 못지 않은 운치가 느껴지게 될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여기클릭!)

 

그렇게 되길 기대해 봅니다.

 

1 Comment

  1. 우연히 들어와서 본 글인데, 말씀에 너무나 공감합니다.
    궁금해서 로드뷰 지원하는 지도로 찾아보니 지금은 맨홀 뚜껑이 싹 교체되었더군요.
    안타까웠습니다.

이 곳에 포스팅에 대한 감상이나 의문을 남겨주시면 성의껏 답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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