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풍경]세종시단독주택/08

사용승인을 앞두고 한창 마감 마무리중인 현장. 며칠 전의 모습입니다.

계단을 올라와서 뒤돌아, 주인침실방면을 바라보는 장면. 집을 대표할 만한 이미지가 될 텐데, 햇볕 효과는 걱정했던 것 만큼 현란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습니다. 시각과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일종의 해시계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들락거리는 세 자녀분들의 시점으로는 부모님의 캐릭터, 부모님의 인기척을 연상케하는 장면이 되리라 생각했고, 그래서 무대처럼 보란듯 멋지게 연출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아무래도 어색해 보입니다. 붙박이 가구가 날개벽까지 꽉 채우게 들어서고, 복도 한켠에 허리높이까지 책장이 들어서야 비로소 완성된 미장센이 됩니다. 기대 반 걱정 반.

따님방과 아드님방으로 연결되는 긴 복도. 유리는 대체로 투명해 보이지만, 시점과 상황에 따라서 불투명한 벽이나 영상을 반사하는 거울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늘어선 유리 고창(clerestory)들은 시점과 상황에 따라서 유리와 거울의 조합처럼 느껴질텐데, 그게 삶의 생생함, 삶의 풍요로움으로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맨 끝의 아드님방. 아이레벨에서는 아껴아껴 최소한의 소통을 위한 창을 뚫는데, 고창이 있기에 전혀 갑갑하지 않습니다. 온전히 한 사람만을 위해 열리는 창문은 방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고창을 통해서 흘러가는 구름과 변하는 햇볕이 보이고, 고정된 집 안이 아니라 천천히 움직이는 배나 비행선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저 만의 착각일지도요.

따님방. 인테리어를 맡아주신 전진화실장님의 배색 감각이 빛을 발하는 모습입니다. 벽면색감과 뻐꾸기창은 다소 보수적인데, 천정으로 조성되는 공간의 윤곽은 대담해서, 좋은 대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유리고창이 차광이나 차음에는 불리합니다. 그런데 저는 가족 사이의 프라이버시가 어느 정도 지켜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들의 방이 호텔방처럼, 완전히 밀폐되는 블랙박스가 될 필요가 있을까, 그런 필요는 과연 언제부터 당연한 조건이었나, 의심합니다. 불과 몇십년 전의 일입니다. 방과 방 사이가 종이 한 장으로 구획되었던 적도 있었고, 온 가족이 한 방에서 살아간 적도 있었습니다. 사생활 나누기의 빈틈에서 가족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기회가 생기고, 가족들 각각의 삶이 겹쳐지고 소통되는 가능성이 생긴다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가족 구성원들 각자의 자아를 강조하는 담론(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어요.)에는 가족산업, 가족전통, 가족공동체를 해체하여 다량의 노동력을 확보해야 했던 산업혁명 초기의 기획이 깃들여있다고도 생각합니다.

주인침실. 초록벽 너머 부부욕실과 파우더룸까지 더하면 넉넉한 마스터배드룸존이 됩니다만, 침실만으로는 아드님방과 따님방과 비슷하게, 콤팩트한 스케일입니다.

[깊은풍경]세종시단독주택/03

오랜만에 포스팅합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겹쳐서 바쁜터라, 때에 맞추어 포스팅하는 것도 쉽지 않네요.

세종시단독주택은 지난 7월2일 착공 이후, 12월 말 완공을 목표로 한창 시공 진행중입니다. 시공을 맡은 하우스컬쳐 의 김호기소장님께서 현장관리를 워낙 꼼꼼하게 잘 해주시는 덕분에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현장 실무에 대해 아시는 것이 많고 디자인에 대한 욕심도 많으셔서, 건축가인 제 입장에서도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돌이켜보면, 건축허가 과정에서 지구단위계획지침 해석 관련 우여곡절이 있었더랬습니다.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지만 나름의 교훈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관련된 내용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지난 4월 말의 일입니다.

아시다시피 세종시는 지구단위계획지침을 엄격히 적용하기로 유명합니다. 세종시청 건축과와 별개로, 지구단위계획 관련 내용을 담당하는 ‘행복청’이라는 별개의 기관이 있을 정도입니다. 정돈되고 일관된 도시풍경을 연출하기 위함이겠지요. 여러 지침 내용들 중 지붕 모양 관련된 ‘권장사항’이 있는데, 그 권장사항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완’ 지시가 떨어졌었고, 설계자로서 그 지시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에 반박 자료를 만들었더랬습니다. 그 자료를 올립니다.

담당 공무원에게 보여드릴 목적으로 만든 일종의 보고서입니다. 표지.

문제의 조항이 왜 의무가 아닌 권장사항으로 되어 있는지 짐작하고,
계획된 평면 계획에 권장사항을 의무적으로 적용한다면 오히려 불합리하며,
오히려 허가신청 내용이 권장사항과는 조금 거리가 있으나,
오히려 여러 면에서 지구단위계획지침의 취지를 잘 살리고 있다.
는 주장을 담은 보고서입니다.

보고서도 만들고 모형도 만들어서 협의를 해보았으나, 이의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구단위계획 권장사항에 맞춘 지붕디자인의 대안을 새롭게 만들었고, 그 내용으로 건축허가를 받아서 시공 중입니다. (아마도 다음 포스팅에서 보여드리게 되겠지요.)

앞서 말씀드린대로 지구단위계획지침은 정돈되고 일관된 도시풍경을 연출하기 위해 설정된 약속입니다. 결과적으로 개별 건축가의 디자인 자유를 제약하기 마련입니다. 저는 지구단위계획지침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건축가로서 마땅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형식적으로 지키기 보다는 지침의 취지를 살리는 방향으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구단위계획지침 적용방침이 까다로워진 데에는, 지구단위계획지침의 취지를 무시하고 지침의 적용을 편법적으로 회피해온 건축가들의 책임도 어느 정도는 있다고 봅니다. 지침의 적용을 경직되게 주장하는 담당자들의 입장을 그래서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쉬움은 남습니다. 당시의 허가신청안이 지구단위계획지침의 취지에 더 충실한 안이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깊은풍경]세종시단독주택/02

구체적인 평면계획이나 공간구성은 훗날 기회가 있을 때 정리해서 드러내기로 하고, 지금은 일단 개략적인 내용을 보여드리기로 합니다.

1층을 놓고,
그 위에 2층을 놓고,
지붕을 올리기 전, 지붕과 2층 벽면 상단 사이에 고창(clerestory)를 끼웁니다.
차양, 루버, 선홈통 같은 요소들도 중요하지요.
이제 그 위에 앞선 포스팅에서 탐구했던 지붕을 올립니다. 지난 원주 나비지붕집에서는 각형강관으로 뼈대를 삼았었는데, 이번은 중목구조를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구조층과 단열층을 겹칠 수 있어 지붕 두께를 대폭 줄일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리고 접히는 지붕 단면 형상에 맞추어 부재단면을 가공할 수 있으니, 실내 천정 마감면을 만들기에도 조금은 편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주 나비지붕집에서는, 아무래도 처음 시도하는 형식이다보니, 시공과정에서나 사용이나 관리 면에서 교훈으로 삼을만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원주 나비지붕집의 스타일을 한층 고도화하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하늘 어디엔가에서 모형을 바라보는 시점에서는 올망졸망하게 접힌 면들이었는데, 눈높이에서는 사뭇 다른 인상이 느껴집니다. 어떤 시점에서는 원근감 덕분에 지붕의 방향성, 운동성이 강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의도는 아니었는데, 마치 조각난 지붕 용마루들이 일직선으로 연결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진입하는 도로에서 보면, 역시 의도는 아니었는데, 지붕이 한방향으로 솟구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의 포스팅은 과거의 기록입니다. 몇 주 뒤, 지구단위계획지침 해석 관련 뜻하지 않은 마찰을 겪게 되고, 지붕 디자인에 변화가 생기가 됩니다.

[깊은풍경]세종시단독주택/01

매체에 실린 나비지붕집이 마음에 들어 찾아 오신 의뢰인.

치열한 직장생활을 하고 계신 맞벌이 젊은 부부와 세 명의 아직 어린 아이들. 다섯 식구가 살아갈 집을 설계하게 되었습니다.

세종시 단독주택필지로, 경계를 알아 볼 수 없는 벌판에 자리한 어느 땅입니다. 작은 찻길 건너 커다란 유치원을 마주하고 있고. 조금 멀리 얕은 산이 있고. 아주 멀리로는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무수히 많은 아파트들이 보입니다. 길 건너 유치원에게 다정하고 자랑스러운 이웃이 되고 싶습니다. 멀리 보이는 아파트들에게는 단독주택만의 매력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마을의 탄생을 알리는 집의 등장이 될 터이니, 뒤이어 들어설 이웃집들에게는 본보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종류의 책임감을 느낍니다.

필요한 공간목록과 공간조직, 꿈꾸는 생활상, 개인적인 취향, 꾸려나가고자 하는 가족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설정. 사소하고 소박한 취향. 집에 관련되어 떠오르는 모든 이야기를 두서 없이 편하게 써달라 부탁드렸습니다. 느슨한 수필과 단편소설, 그리고 상품 주문서의 성격이 뒤섞인 글입니다. 가장 유력한 길잡이가 될 글이니, 밑줄 그어가며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습니다.

땅에 집을 어떻게 앉힐 것인지부터 궁리하기 시작합니다. 네모 반듯하게 차곡차곡 늘어선 땅에서. 만들어야 하는 면적을 채우면서. 길에서 떨어진 아늑한 마당, 자동차 두 대가 여유롭게 머무를 수 있는 주차장 등, 몇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배치대안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일곱가지 배치 대안에서 압축된 두 가지 대안. 그 두 가지 중에서 권해드리고 싶은 한 가지의 대안으로, 건축가의 선택은 우여곡절을 거쳐 이미 정해졌습니다. 크고 작은 도면으로 출력해서 찢고 오리고, 이리저리 둘러보며 설명드렸습니다. 어렵지 않게 동의해주셨습니다.

권해드린 배치 대안에는 간략한 평면 계획이 들어있었습니다. 하얀 종이 위에 그려진 까만 선. 그 선들이 의미하는 공간은 실제로는 얼마나 넓고 긴 느낌인가. 스케일 감각을 공감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아낌 없이 커다랗게 출력해서 보여드렸습니다. 그리고 움직임의 흐름, 시선이 지나가는 길, 가구가 놓일만한 가능성 등을 두서 없이 알록달록한 색연필로 마구 그어가며 설명드렸습니다. 의뢰인도 다른 색깔의 색연필로 대응합니다. 예전에 정림건축학교에서 써먹었던 스케일 인형이 아주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더불어, 앞으로 진행될 설계 일정표를 보여드렸습니다. 설계 과정은 의뢰인도 건축가도 아직 모르는 어디엔가로 함께 떠나는 여행과도 같습니다. 그 속에서 일정표는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배치대안과 간략 평면이 정해졌으니, 첫 만남 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공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두번째 만남에서는 다듬어진 평면계획과 더불어 외장재의 가능성을 탐구했습니다. 너무 실무적(?)으로 진행되는 것 같아서, 일부러 조금 느슨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습니다. 빠듯한 일정이기에 진행속도가 중요합니다만, 그럴 수록 빠뜨리기 쉬운 핵심 가치를 거듭거듭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번째 만남. 두꺼운 선으로 그렸던 벽에 실제 두께가 표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평면과 더불어 입체 상황을 설명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나비지붕집에서는 기대 이상의 성취도 있었지만, 실행과정에서의 착오와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구축의 측면에서나, 형식의 측면에서나, 조형으로나, 조금 더 개념에 충실하고, 그래서 더 발전된 나비지붕집을 구현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의뢰인도 나비지붕집의 이미지가 마음에 들어 찾아오셨으니, 충분히 해볼만한 일입니다.

나비지붕이라는 형식 속에서, 최대한 편견을 버리고 여러 대안들을 만들었습니다.

공간의 배치 상황, 겉으로 보이는 조형, 빗물 처리 등… 고민할 조건들이 몇 있습니다. 결국 선택된 것은 가장 균형잡히고, 가장 규칙적인 패턴을 보이는 대안이었습니다.

나비지붕 조형 탐구와 더불어, 벽두께와 창호, 그리고 수납가구가 표현된 평면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평면은 평면대로 계속 다듬어집니다. 모형으로 표현하기 아직은 애매한 것들은 컴퓨터모델링으로 보여드립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양. 그리고 평면의 상세한 내용. 결국 ‘창문이야기’입니다. 창문 하나하나의 모양, 위치, 여닫는 방식을 말씀드리며, 그 이유를 설명드렸습니다. 수정을 위한 ‘빨간펜’을 준비했습니다. 원하시는 내용을 모형 위에 주저하지 마시고 그려달라 했습니다만, 너무 마음에 들어서 달리 하실 말씀이 없다 하셨습니다.

협의가 끝나고 의뢰인은 떠나시고 혼자 남아서. 선택된 지붕 대안을 얼른 만들어 큰 모형에 올려보았습니다.

1/30 스케일의 큰 모형이다 보니, 실내 풍경 찍기에 좋네요. 1층 가족실. 천정은 높게. 창문은 낮게.

나비지붕의 효과는 길게 뻗은 복도에서 진가를 발휘합니다.

계단실 겸 가족실로 이어지는 2층. 고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의 효과와 접힌 지붕의 조형 효과가 그럭저럭 상상이 됩니다. 선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고]언북중학교다목적강당

아이디알건축사사무소 신작, ‘언북중학교다목적강당’ 비평이 공간지 2019년3월호 (SPACE 616)에 실렸습니다.

저는 이런 기회가 참 좋습니다. 좋은 건축가를 만나고, 좋은 건물을 구경할 기회가 되거니와,

비평글을 쓰면서 생각하는 힘이나 글쓰는 힘을 단련하는 계기도 해서요.

지면에는 분량의 한계도 있고 편집부가 원하는 글의 방향도 따로 있어서, 글의 일부가 생략되기도 했고, 뉘앙스가 미묘하게 달라진 감이 있습니다. 물론 편집부의 요구를 따라 다듬으면서 글의 완성도가 높아진 측면도 있지만, 아쉬움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최종 원고에 생략되었던 부분을 결합하여 이 곳에 올립니다. 더불어, 언젠가는 비평글이 아닌 작업으로 공간지에 참여하게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겨울의 끝자락, 아침 바람은 아직 매서웠다. 기자와 나에 비해서 건축가는 제법 늦을 모양이었다. 건축가를 기다리는 사이 체육관 안을 미리 둘러보고 싶었는데, 수위실 인터폰 너머 행정실은 허락하지 않았다. 행정실의 반응을 뒤늦게 전하는 기자에게 건축가는 옅은 미소를 띄웠다. 발주처와 건축가 사이 벌어졌던 ‘구조적 불화’에 대해서 대충은 알고 있던 터였다. 건물을 둘러보는 중간중간 건축가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아이디알은 설계공모전 당선을 통해 압구정초등학교와 언북중학교, 두 학교의 다목적강당을 설계하게 되었다. 큰 사무소는 이렇게 작고 귀찮은 일에 덤벼들려 하지 않았고, 정보력이 부족한 작은 사무소는 이렇게 재미있을 법한 일이 있는지를 아직 모르고 있었다. 덕분에 갓 시작한 작은 사무소로서는 감사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기쁨과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건축에 대한 열정과 디자인의 가치에 대한 믿음만으로 덤벼든 어린 건축가에게, 선수들끼리 사이 좋게 지내오던 ‘판’은 상냥하지 않았다. 처음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건축가에게 모든 과정이 낯설었다. 건축가의 정성과 소신은 느닷없는 고함 소리에 묻히기 일쑤였다. 발주처는 건물의 주인인 자신들을 두고 ‘감리자도 아닌 설계자’가 왜 벽돌의 미묘한 질감 차이에 집착하는지, 왜 방음벽 패턴에까지 신경 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건축가의 의도를 최대한 반영하려는 현장소장의 마음이 빛났다. ‘감리자도 아닌 설계자’에게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전화를 걸어 디테일을 협의했다. 그래도 공사비 삼백만원을 아끼기 위해 전동커튼 대신 시커먼 필름지로 ‘빛의 상자’를 덕지덕지 발라버리는 사태를 막을 수는 없었다. 밝은 회색빛의 컨트롤 조인트가 벽돌벽을 보란듯이 가로지르는 것도, 번쩍거리는 스텐레스 난간 기둥이 세워지는 것도 막을 수 없었다. 이 모든 ‘사태’에도 불구하고, 언북중학교 다목적강당은 평범한 학교 건물 이상의 세련된 스타일과 높은 완성도를 성취하였다.

 

건축가의 설명에 따르자면, 그들은 “아이들의 창의성을 위해서라며 알록달록한 원색을 쓰거나 아기자기한 장식을 다는 것이 아니라, 두어 개의 단정한 재료로 물성의 섬세함과 단아함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리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단순한 톤의 공간에서 자연스러운 빛과 그 속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건물을 만들고” 싶었다. (비평자의 생각으로는) 원색의 요소나 곡선의 모티브를 붙이는 식으로 ‘디자인을 덧씌우는’ 흔한 수법은, 사실은 아이들을 어른들의 세계로부터 격리하고 싶어하는 학부모들의 욕망과, 예산투입의 성과를 쉽게 드러내고 싶어하는 관료들의 바램, 그리고 편하게 짓고 싶어하는 시공사의 희망이 절충된 결과일 뿐이다. 건축가가 믿는 ‘건축의 가치’와 건축가가 집중하고자 하는 ‘동시대성에 대한 고민’은 ‘아이들이 쓸 건물’이라고 가릴 만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아이들을 존중하는 태도일 것이다. ‘특정한 형태적 어휘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설명하지만, 아이디알의 작업들에서는 분명 일관된 흐름이 느껴진다. 그들은 ‘해야 하는 말’의 틀 안에서 ‘하고 싶은 말’을 뽑아내며, 설명될 필요가 없거나 설명될 수 없는 말은 아예 건드리지 않는다. 가령, 해결해야 할 과제(장스팬의 대공간)에 대한 기술적인 해결(참신한 구조시스템)을 통해 공간의 스펙이 아닌 공간의 가치(생동하는 공간감)를 창출한다. 없어도 되는 무언가를 무의미하게 덧붙이기 보다는, 굵직굵직하게 벽면을 접고 자르고 겹쳐서 스케일의 부담감을 극복한다. 그리고 그렇게 접고 자르고 겹쳐서 생긴 거대한 균열을 내부 공간 연출의 유력한 단서로 삼는다. 길다란 직육면체 윤곽으로 짜인 트러스는 넓은 지붕을 지탱하는 핵심 구조체이자, 어두운 체육관 속으로 빛을 끌어들이는, ‘빛의 상자’이다. ‘빛의 상자’는 무뚝뚝하고 거대한 벽돌 덩어리를 적절히 갈라놓는 동시에 긴밀하게 묶어내는 이중적인 역할을 한다. 톱니처럼 튀어나온 ‘빛의 상자’는, 밖으로는 흔한 박공이나 볼트(vault)와는 사뭇 다른, 기념비적이고 단호한 표정의 스카이라인을 연출한다. 안으로는 균열된 틈을 통해 확장되는 공간감, 그리고 거대한 공간의 윤곽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 같은 미묘한 긴장감과 생동감을 연출한다. 촘촘히 늘어선 루버는 밝게 빛나는 ‘빛의 상자’와 어두운 필로티 사이의 어색함을 세련되게 풀어주고 있다. 야구공을 막는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기능과 함께.

 

얼핏 무뚝뚝해 보이지만 언북중학교 체육관은 넓게 펼쳐진 운동장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 살펴보면 살펴볼 수록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스멀스멀 피어 오른다. 그 것은 ‘학교 이야기’도, ‘체육 이야기’도, ‘아이들 이야기’도 아닌, 그냥 ‘건축 이야기’이다. 탄탄하고 정갈하게 짜여진 담백한 건축 이야기. 그 것이 곧 건축가가 공공을 향해 풀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서비스 아니겠는가.

 

한편으로는, 건축가가 추구하는 ‘건축의 가치’ 속에 기존 맥락에 대한 배려가 자리잡을 여유가 보이지 않는다. 건축가는 기존 학교건물에서 ‘건축적인 가치’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모듈이든, 패턴이든, 어휘든, 재료든, 새 건물을 디자인하면서 옛 건물에서 참고할 만한 것은 없었다고 잘라 말한다. 그게 비평하는 입장에서는 아쉬운 지점이었다. ‘건축적인 가치’는 ‘건물’이 아닌 보는 이의 ‘시선’ 속에 있다고 믿는 입장에서는 말이다. 엄격한 모더니스트로서의 당연한 태도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그런 단호함 덕분에 관료주의와 타성을 돌파해서 이 만큼이나 성취해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건축가의 태도를 존중하는 한편으로, 형편없이 평범한 일상에서 나름의 가치를 찾아내려 하는 따스함까지 갖추게 되었을 때의 작품을 자꾸 기대하고 싶어진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종 업계 종사자로서 오랫동안 지켜보며 배우고 싶고, 함께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다.

 

희망1 : 과정과 교훈을 건축가는 일일이 정리해서 매뉴얼로 만들었다. 그리고 새로 이 ‘판’에 들어오고자 하는 또래 건축가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건축가는, ‘그새 경쟁률이 높아져서 이제는 당선되기 어려울 것 같다.’며 웃는다. 그래도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 또 하면 더 잘 할 자신이 있느냐는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빛나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희망2 : ‘건축의 가치’에 아이들은 반응한다. 어느 날, 언북중학교 학생 하나가 막무가내로 설계사무소에 찾아왔다. ‘공간이 너무 좋아, 시간 날 때마다 체육관 안에 들어가 서성거린다’면서, 건축가를 붙잡고 건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두서없이 이어지던 건물 이야기는 어느새 진로상담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깊은풍경]나비지붕집/전원속의내집 게재

월간전원속의내집 표지

월간 전원속의내집 2019년 1월호에 ‘나비지붕집’이 소개되었습니다. 급박한 일정에서 애써주신 편집장님과 최지현 작가님, 그리고 흔쾌히 취재 허락해주신 건축주께 감사드립니다.

전원속의내집 첫번째와두번째페이지
전원속의내집 세번째와 네번째 페이지
전원속의내집 다섯번째와 여섯번째 페이지
전원속의내집 일곱번째와 여덟번째 페이지
외부 전경
ⓒ최지현
이웃집들과 함께 자리잡고 있는 나비지붕집. 나비모양으로 여러 번 접힌 지붕은 이웃 박공지붕 집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얼핏 평지붕인 것 같은 납작한 실루엣을 연출, 붉은색 벽돌마감과 더불어 탄탄하고 야무진 이미지를 연출한다.
ⓒ최지현
2층 가족실 전경. 접힌 지붕 모양 그대로 실내에서는 천정이 된다. 벽은 천정의 저점까지만 올라가고, 벽과 천정 사이 세모난 틈은 유리로 채워진다. 틈을 관통해서 천정판은 막힘 없이 이어진다.
ⓒ최지현
1층. 상부 유리바닥을 통해서 2층 가족실의 공간 분위기가 식당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정사각형 윤곽의 통통한 공간이지만 갑갑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유리바닥에는 필요에 따라, 부분적으로 러그를 깔거나 반투명 필름을 붙이는 식으로 개조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었다.
ⓒ최지현
낮은 계단은 수납공간을 품은 목계단으로, 높은 계단은 캔틸레버 철판으로 날렵하게 연출했다. 오른쪽 구석, 낮은 바닥으로 처리된 곳은 놀이방 겸 게스트룸.
ⓒ천경환
2층, 옷방, 욕실, 주인침실을 잇는 복도 겸 파우더룸. 한 켠에 마련된 화장대는 깊이는 얕지만 폭이 넓어서 활용도가 높다. 해링본 패턴의 원목마루는 바닥을 실제보다 넓어 보이게 한다. 건축주의 센스.
ⓒ천경환
계단 중간, 1층과 2층의 경계. 2층의 고창으로 들어온 빛은 관통하고, 부서지고, 때로는 반사되며 공간 구석구석을 물들인다. 
ⓒ최지현
가볍게 둥실 떠다니는 듯한 2층의 분위기와 납작하게 가라앉은 1층의 분위기가 한 눈에 보이는 장면.
ⓒ천경환
밤이 되면 유리바닥은 빛의 바닥이 되어 1층의 인공광을 2층으로 솟구치게 한다.
ⓒ천경환
해질녘 2층 가족실 풍경. 시간의 변화에 따라 빛의 방향 뿐 아니라 공간의 색깔도 바뀐다. 지붕 모양 대로 접혀진 천정판은 빛을 담는 스크린이 된다.
ⓒ최지현
해질녘의 모습. 낮에 햇살을 받아들이는 입구였던 고창은, 밤에는 내부의 빛과 공간감을 바깥으로 발산하는 출구가 된다.

보다 자세하게 정리된 내용은 이 곳으로…

[깊은풍경]반곡동주택/06

완공 사진

 

며칠 전, 잡지사에서 소개해주신 사진작가님이 사진을 찍는 사이,

제 나름대로 소니 똑딱이로 찍은 사진들입니다.

매체에 실리기 위한 사진 촬영이기에 가구나 소품들을 말끔히 정리하고 찍었는데,

지난 포스팅에 올렸던 인스타그램 사진들에 비해 어색하고 경직된 느낌이라 조금 아쉬웠습니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마구 어지러운 모습의 인스타그램 사진들이 더 나아보입니다.

 

사진작가님의 관점과 제 관점이 다를 것이기에,

매체를 통해 발표되는 사진들과는 조금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공통점과 어떤 차이점이 있을지 기대 됩니다.

사진촬영은 결국 상상과 구현의 차이를 확인하는 일이고,

그래서 뿌듯함과 후회가 교차하게 됩니다.

뿌듯함과 후회 모두, 다음 프로젝트를 위한 귀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설계자이자 감리자로서, 마감 공사 막판에 이런저런 이유로 현장에 충분히 집중하지 못했고,

시공사 없이 직영으로 모든 공사를 진행하는 건축주께 충분한 도움이 되지 못한 점이 두고두고 송구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촬영을 위해 여러모로 배려해 주시고,

외부 매체 발표를 흔쾌히 양해해주신 건축주 내외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층 주방에서 계단과 놀이방, 창 너머 데크를 바라보는 시점. 이전 포스팅에서 올렸던, 인스타그램을 의식한 정사각형 프레임과는 조금 다른 느낌.

거꾸로, 놀이방에서 주방쪽을 바라보는 시점. 어두운 동굴같은 공간이 보이는데, 덕분에 노출콘크리트의 견고한 느낌이 강조됩니다.

동굴들 중 하나는 욕실로 통하는 짧은 복도. 욕실과 식당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곧바로 붙어있는 상황은 아무래도 어색합니다. 그래서 사이 공간을 둔 것이지요. 공간 효율은 조금 떨어지나, 생활의 격과 여유는 높아집니다. 둥근 거울과 조명 연출은 온전히 건축주의 센스. 설계를 진행하고 건물을 짓는 내내 건축주로부터 배운 것이 많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길. 유리 바닥이라는 경계를 관통하기에, 마치 물 속에서 물 바깥으로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초겨울 아침 여덟시 무렵. 매끈한 철판 계단 위에 난간 철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계단의 디딤판과 챌판이 입체로 엮어지기에, 아주 단순한 그림자의 패턴이 의외로 풍요로운 모습을 연출합니다. 사실 이런 장면까지 예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익스팬디드메탈 (철망)을 쓰면서 기대할 만한 것을 확인했다는 사실이 뿌듯합니다.

점심을 지나 늦은 오후. 햇볕의 방향과 고도에 따라서 실내 분위기가 많이 달라집니다.

해진 후, 2층 조명을 켜기 전. 1층에서 유리바닥을 통해 올라오는 빛이 지붕에 얼룩을 그리는 모습.

2층은 사적인 매스터배드룸존과 아주 조금은 공적인 가족실, 두 영역으로 나뉘는 공간 구성입니다. 두 영역을 가르는 벽은 아무런 하중을 지탱하지 않는, 비내력벽입니다. 벽체와 상부 수납공간 사이에는 슬릿이 뚫려 있는데, 마감공사 직전에 결정된 내용입니다.

이 벽은 동쪽을 향해 있기에, 특히 아침 햇볕을 받아 극적인 효과를 연출합니다. 위로부터 차례로, 아침 여덟 시, 아침 열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시 무렵. 날카롭게 접힌 지붕 조형은 대체로 삼각형 모양으로 보이는데, 특정 시점에서는 입체가 아닌 평면같은 느낌을 자아냅니다.

해진 직후. 천정은 아무런 조명도, 설비도 달려있지 않은, 그냥 하얀 판입니다. 2층의 모든 빛은 천정판 아래, 벽체 위에서 쏘아 올려지는 간접광으로 연출됩니다. 트랙 위 조명 개수와 각도를 조절하면서 천정판에 펼쳐지는 빛의 얼룩을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습니다. 완만한 각도로 꺾인 지붕판이 실내에서는 그대로 천정이 되는데, 어떤 특정 각도에서는 눈 앞에서 마치 절벽처럼 쏟아지듯 엄습해옵니다. 그 것을 앞서 ‘평면같은 느낌’ 이라 표현한 것이죠.

슬릿 뚫린 벽의 안쪽, 주인침실과 옷방, 욕실, 그리고 그 세 영역을 잇는 파우더룸을 겸한 복도. 슬릿이 숨통 역할을 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해링본 패턴의 원목마루 또한 건축주의 센스. 공간을 콤팩트하게 엮느라 복도 한편에 놓인 화장대는 깊이가 얕은 편입니다. 그래도 폭이 넓어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은 넉넉한 편입니다.

옷방과 주인침실을 오가는 복도에서 시선을 옆으로 돌리면 보이는 모습. 매일매일의 아침 햇살이 부디 기쁨으로 다가오기를 기도합니다.

 


 

나비지붕집

이것으로 반곡동단독주택의 ‘작업과정/IN_PROGRESS’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내년 1월 매체에 실린 후, ‘작업결과/PROPOSAL’ 카테고리에 정리 포스팅을 올릴 예정입니다. 그 때, 집 이야기를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할 생각입니다. 집 이름은 지붕의 모양을 따서 ‘나비지붕집’이라 부르기로.

 


 

[깊은풍경]반곡동주택/01

[깊은풍경]반곡동주택/02

[깊은풍경]반곡동주택/03

[깊은풍경]반곡동주택/04

 

 

[깊은풍경]반곡동주택/05

 

 

[깊은풍경]반곡동주택/05

반곡동주택은 며칠 전 사용승인을 받았고, 지금은 건축주 이사짐 정리 진행 중입니다. 엇그제 현장에 인사드리러 간 김에,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인스타 필터를 먹여서 사진 톤이 두서없습니다.


1층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놀이방에서 식당과 주방을 바라보는 시선. 가운데 2층 가족실로 통하는 하얀 프레임의 투시바닥이 보입니다.

거꾸로, 주방에서 놀이방을 바라본 장면. 아담한 정사각형 윤곽의 공간인데, 대각선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면 제법 시원한 느낌이 납니다.

거푸집을 짜고 레미콘을 부어서 만든 계단은 둔하고 안이한 이미지라 생각했습니다. 철판을 접어서 캔틸레버로 붙여 만드는 계단이 날렵하고 가뿐합니다. 철판 계단이 매달려있는 두툼한 콘크리트 구조체의 긴장감도 한층 돋보이고요. 그런데 철판 계단은 날카로워서 안전사고 걱정도 있고, 사고까지는 아니더라도 느낌이 안 좋으니, 사람 키 높이 위로만 붙입니다. 키 높이 아래부터는 계단 밑 공간을 활용하기 편한 나무 계단으로 만듭니다. 위 아래 계단이 조형적으로는 서로의 거울상이 된 듯한 상황입니다. 나무와 철판, 다른 두 재료들이 맞닿는 부분은 살짝 간격을 둡니다.

철판계단은 머리 위 높이에 달려있으니 마음껏 날카롭게 연출합니다. 날카로운 모양 그대로 힘을 받는 역할을 겸합니다. 나무, 철판, 유리… 계단과 바닥 재료가 달라지면서 각파이프, 메쉬, 유리… 난간 형식도 달라집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펼쳐지기 시작하는 장면…

2층 가족실. 유리바닥, 콘크리트, 원목마루. 재료는 달라지는데 가구들은 경계를 가로질러 느슨하게 배열됩니다.

투시바닥. 구조 역할로는 이중유리로 충분하지만, 표면으로 드러나는 유리는 손상될 수 있으니 한겹을 더 해서 삼중으로 겹쳤습니다. 시선을 적당히 걸러주기 위해서, 기분좋은 비례를 위해서, 아래로 쏟아지는 빛을 적당히 쪼개기 위해서, 그리고 넌슬립 역할을 위해서, 구조에서 허용하는 크기보다 잘게 나누었습니다.

단순하게 접힌 지붕 조형의 전모가 잘 파악이 되지 않는 어느 시점. 벽 상단의 유리 칸막이에 반사된 영상이 혼란을 더해줍니다.

바닥의 유리에서 반사된 빛은 두툼한 삼중유리의 물성을 반영, 좀 더 쫀득한 인상으로 변해 공간 구석구석으로 흩어집니다. 이런 효과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가족실과 욕실복도를 나누는 벽에 뚫린 틈. 을 통해 가족실을 바라본 장면.


바닥 마감재가 깔리고 가구와 소품이 놓이니 비로소 공간에 생기가 도는 듯 했습니다. 무채색 벽면이 느슨하게 제각각 펼쳐진 가구들을 위한 좋은 배경이 되었습니다.

[깊은풍경]패트병으로만든벽

패트병

지난 9월12일, 광명동굴 근처에 위치한 광명업사이클아트센터에서 ‘패트병의 재발견’이라는 주제의 전시가 열렸습니다. 저는 AnLstudio의 신민재 소장님 소개로, 패트병을 소재로 작업하는 작가들 틈에 끼어서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정리해서 포스팅합니다.


시작

패트병 작업! 가구나 작은 오브제를 만드는 작업은 이미 많은 작가분들이 활발히 발표하고 있었습니다. 한달이 채 안되는 작업기간 동안, 아무런 배경이 없는 제가 불쑥 끼어들 만한 방향은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다른 작가들의 작업과는 차별되는, 건축가이기 때문에 제안할 수 있는 방향은 무엇일지 고민했습니다. 각진 패트병을 쌓아서 큰 벽을 만드는 작업이면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무난하게 쌓아 올리되 물량으로 승부하기로 했습니다. 안에 색깔있는 무언가를 넣어서 쌓는다면, 벽을 이루는 벽돌(패트병) 하나하나를 픽셀처럼 활용할 수도 있겠습니다. 메시지를 새길 수도 있겠구요.

시간이 얼마 없으니 가볍게 생각하고 얼른얼른 확인…

아직 병을 어떻게 쌓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단순하게 병을 벽돌처럼 배열하고 글자를 넣어봅니다…

커다랗고 단순한 작업이 될 것이니, 벽에 새겨지는 글자라도 최대한 ‘있어보여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벽 길이를 확인하면서 글자 모양을 계속 다듬었습니다.

문득 정말 벽돌처럼 평평하게 쌓는 것 보다는, 자잘하게 지그자그로 쌓아야 구조적으로 조금이라도 안정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왼쪽 아래 스케치)

모델링

얼른 모델링으로 여러 가능성을 검토해봅니다. 평범한 벽돌처럼 쌓기도 하고.

앞서 언급한, 스케치의 아이디어처럼 지그자그로 쌓기도 하고.

그냥 꽉 맞춰서 쌓으면 갑갑해 보일 수도 있으니, 조금씩 간격을 두어 보았습니다. 지그자그의 변 길이가 길어져 구조 안정성이 높아지는 효과도 기대되고요. 이렇게 성글게 쌓으면, 쌓아야 할 병의 개수를 줄일 수도 있겠습니다.

지그자그로 쌓되, 병뚜껑을 안으로 감추는 식으로 쌓기도 하고. 세번째와 네번째 사이에서 고민하다, 하얀 병뚜껑도 의장 요소(?)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차원에서 세번째 대안으로 결정했습니다.

 

세번째 대안에 글자를 새기고 전시장에 앉혀보았습니다. 맞춤처럼 딱 맞아서 놀라움.

효과를 짐작하고 스케일감을 확인.

도면

개념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만들어야 하니, 제작을 위한 도면을 그려야 합니다. 제작에 참여할 분들은 작업의 상세한 내용을 모르는 분들일 것입니다. 번잡한 현장에서 착오나 오해 없이, 정확하게 만들 수 있게끔 도와주는 도면이 필요합니다. 익숙치 않은 재료와 구성방식이라 평소에 그리던 건축도면과는 표현방식이 조금 다를텐데, 큰 틀에서의 취지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최적의 표현방식을 찾아내는 과정이 저는 참 즐거웠습니다. 도면 작업한 아르바이트 학생도, 적어도 겉으로는 즐거워 보였습니다.

나름 상세도면도 그리고, (양면테이프로 접착)

뚜껑끼리 고무줄로 묶어 보강한다는 아이디어는 이런저런 이유로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실행

아래 두 단에 자리잡을 120개의 병에는 물을 가득 채워서 조금이라도 튼튼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을 수 있도록 합니다. 전체 1,800개의 패트병에 일일히 뚜껑을 채우는 것도 큰 일이었습니다. 사실은 버려진 패트병을 모아서 재활용해야 ‘업사이클’이라는 개념에 부합할 것입니다. 하지만 1달 동안의 준비기간 동안 아이디어를 내고, 계획하고, 실제로 작업까지 해서 설치를 마쳐야 하는 여건에서는 아무래도 무리였습니다.

‘글자’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도 큰 고민이었습니다. 식용색소를 풀어낸 물, 작은 스티로폼 공, 콩 등등, 벼라별 상상을 하고 가격과 시공성(?) 등을 따져보며 검토하였습니다. 완충과 장식을 위해 선물상자 속에 채우는 종이보푸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균등하게 양을 나누고 (아이에게 국수 먹이듯) 1800개의 좁은 입으로 밀어 넣는 것 또한 큰 일이었습니다.

자리잡고 열 맞춰 쌓아 올렸는데,

정확히 수직이 아니다 보니 점점 기울어지다 조금씩 무너지더라고요.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기 위해 낚시줄로 배후의 벽에 묶어 고정하다 보니, 힘이 몰려서 거꾸로 그 방향으로 와장창 무너지는 충격과 공포.

낚시줄로 배후 벽과 전면 상부 천정, 앞뒤 두 방향으로  묶어 고정하고, 중간중간에 케이블타이로 엮어서 전시 오픈 직전 겨우 마무리. 공간이 좁고 렌즈가 후져서 정면에서는 한 씬에 다 담을 수 없었습니다.

지그자그로 자글거리는 조형이라, 비스듬히 보면 글자가 벽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효과가 납니다.

소감

앞서 말했듯 실제적인 업사이클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아직도 아쉽습니다. 보다 진보된 기술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래도 넓은 공간을 무난하게 점유하며 작지않은 임팩트를 낸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른 작가의 작업들과 함께 전체 전시의 구색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의 말씀

좋은 기회를 주신 신민재 소장님,

재료 탐구와 계획검토에 이어 설치까지 도와주신 김혜운씨,

자리에 맞춰 병을 쌓아올리는 데 도움을 주신 강봄이씨와 권솔희씨,

패트병에 물 넣고 양면테이프 붙이는 작업을 해주신 김종화씨와 김한준씨,

빈 병에 빨간 종이를 채우는 작업을 해주신 박윤선씨,

급한 부탁에 멀리서 달려와 이래저래 크게 고생해주신 정희은씨와 박은정씨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포스팅을 마무리합니다.

 

비슷한 작업

[깊은풍경]디자인메이드2010

[깊은풍경]초록풀작목반

[깊은풍경]반곡동주택/04

상상하지도 못했던 황당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공사진행방식은 기존 시공자 배제, 건축주 직영으로 바뀌었고,

느리지만 뚜벅뚜벅, 9월 말 완공을 목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주말에는 내부 유리공사가 있었습니다.

실내 벽 상부를 구분하는 유리 간막이 설치를 시작합니다.

지붕 아랫면과 벽 사이의 틈에 끼우는 작업이었습니다.

바닥 유리 한 장을 놓는 순간.

계획된 바닥면적이 온전히 확보되는 순간입니다.

원래는 철제앵글로 액자를 짜는 계획이었는데, 나무로 짜맞춤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철제앵글에서 나무로 변경되면서, 투시바닥은 마음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좌식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 펼쳐지고, 기대하지 않았던 시선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위 아래 층의 소통…